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은 밀알이 싹트는 원리를 설명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싹과 열매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씨앗은 씨앗을 둘러쌓고 있는 껍질, 영양분을 담고 있는 배젖과 식물의 형체와 DNA를 담고 있는 배로 구성된다. 이 씨앗이 발아되는 원리는 이렇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수분을 흡수하면 씨앗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연화작용을 일으켜서 땅 속 수분과 산소를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수분과 산소가 이입되면 배젖에 저장된 영양소인 유기물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 에너지를 통해 다시 배에 생명력과 영양을 공급해서 자족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뿌리와 떡입을 키워낸다. 묘목이 자생적으로 영양을 흡수할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면 결국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이다. 물은 껍질의 연화작용을 도와서 수분이 지속적으로 흡수되는 것을 돕을 뿐 아니라 성공적 연화작용을 통해 흡수된 수분 속에 함유된 산소를 분해해 배젖 속의 영양분을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모든 생명의 물에서 시작된다.
결국 요한복음 12장 24절은 껍질과 배젖이 희생해서(죽어서) 배를 스스로 자랄 수 있는 묘종으로 만드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씨앗 껍질이 자기만 살겠다고 연화작용을 하지 않는 것을 자기희생이 없는 상태로 비유했다. 한자어 혁신(革新)이란 말이 껍질을 새롭게 하기 위해 껍질을 벗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몸은 자라고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연화작용을 하지 않아서 자신을 단단한 껍질 속에서 질식시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환경과의 경계를 유지해가며 정체성을 표현해주는 껍질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씨앗이 묘종을 만들어내는 원리도 씨앗의 껍질이 묘종을 키워내면 묘종이 만든 새로운 껍질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원리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장한다는 것은 커져가는 몸에 맞는 새로운 껍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연화작용의 과정이다. 인간도 8년마다 연화작용을 통해 자신의 피부를 완전히 바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화는 몸이 더는 자생적으로 연화작용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조직에서 낡은 껍질을 벗지 못해 새로운 껍질을 만들지 못하는 현상을 자기방호(Defensive Routine or Self Sealing) 기제가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잘못된 삼투막처럼 자신이 옳다는 이야기는 일방적으로 쏱아내지만 밖에서 새로운 정보와 에너지가 이입되지 못해 조직이 정체된 현상을 의미한다.
조직을 잘 경영한다는 것은 이런 껍질(경계)를 잘 관리해서 구성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연화작용이 원활해서 경계의 확장과 관리가 잘 이루어지는 조직은 환경으로부터 충분한 물, 산소를 공급 받아서 조직구성원의 성장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물은 구성원과 구성원간의 보이지 않는 벽에 연화작용을 일으켜서 연결시켜주고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물에서 분해된 산소를 통해 조직에 필요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에너지가 만들어져야 서로에 대해 따뜻함을 유지하는 긍휼감이 넘치는 조직이 된다. 긍휼의 따뜻함이 없는 조직은 성장이 멈춘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것도 밤에 사람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굴게 모여 앉아 상대의 등을 지켜주면서 경계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둥굴게 모여 앉아 모닥불에서 나오는 빛과 에너지를 투사해가며 더 나은 내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함을 이용해서 문명을 키웠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전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전을 복원하기 전에 성벽을 먼저 복원해서 일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 기업에서 회자되는 ESG 운동도 결국은 원활한 연화작용을 돕기 위한 경계관리 운동이다. 이전에는 기업은 기업경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상처를 주고 자신의 에너지(돈)만을 지키는 방식으로 생존을 구가했다. 자신과 환경과의 벽이 높아지자 오히려 벽은 부메랑이 되어 반기업 정서를 키웠고 환경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는 길을 막기 시작했다.
ESG는 기업경계에 대한 새로운 연화작용 운동이다. 기업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경계를 다시 낮추고 상처를 주었던 환경(E)과의 교류도 촉진하고, 고객과 협력업체를 봉으로 삼았던 사회(S)와의 교류도 촉진하고, 경영진을 넘어서 내부구성원과의 교류(G)도 활성화하는 작업이다.
개인에게 경계관리는 탈 혹은 영어로 De로 표현되는 것을 다시 설계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디자인(De+Sign)이 요즈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각광받는 이유도 경계에 대한 연화작용의 문제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경계의 밖으로 탈출해서 지금 가진 경계가 주는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이 경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다. 디자인이란 물건과 서비스의 경계를 다시 설계해서 제공되는 체험이 환경이나 고객과 신크로나이즈가 되게 만드는 작업이다.
요즈음에 많은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환경에 신크로나이즈 되게 자신의 오만한 정체성을 해체하고 경계를 다시 유연화시키는 작업이다. 환경과 신크로나이즈 되는 경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에너지기 이입되는 통로가 막혀 몸에 결석들이 생기고 결국 결석들이 에너지의 소통을 막아서 암으로 번지고 결국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다시 현대 과학적 용어를 살려 다시 쓰면 아래와 같은 주장이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연화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면 경계가 열리지 않아서 한 알 그대로 남고, 제대로 된 연화작용을 통해 생산적 경계를 만들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삶의 지혜는 세상과 소통이 끊어지지 않는 유연한 경계와 자신만의 고유한 경계의 문양인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확장하고 축소하고 높히고 낮추고 유연하게 만드는 유연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능동적으로 경계에 대한 유연화 작업을 하지 않으면 경계는 동물과 같은 수준인 생존의 경계로 쪼그라든다. 경계가 생존의 경계로 쪼그라들면 본능적으로 환경에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도망가야 하고 약한 대상이 나타나면 잡아 먹어야 한다. 세계관이 약육강식의 세계관으로 바뀌고 매일의 삶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사는 시시포스의 돌굴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에게 당장 요구되는 연화작업은 자신의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피부를 가진 환경과의 소통이 가능한 정체성을 만드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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