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리더십 아카데미 도반들과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고 있다. 천의 고원 7의 고원에 얼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 주에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들뢰즈 클럽 도반들 모여 토론할 주제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얼굴의 흰 표면은 내 내면의 생각들이나 의미가 영화로 상연되는 하얀 스크린이다. 얼굴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생각의 의미(기의)를 주고 받는 장소로 기의를 코드화하여 상영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이 코드화한 의미를 탈코드화 시켜가며 의미를 파악하고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다혈질적이어서 자신이 개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지만 어떤 사람들은 포카 페이스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가 백색의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쭈끌쭈글해진 흰스크린을 보톡스로 펴서 새로운 지층을 만들고 자신의 진짜 스크린을 감추고 산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다 얼굴에 상영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얼굴 전체를 보편적 미의 기준으로 성형해서 자신에 대한 표현을 포기하고 평생 가면을 쓰고 살기로 작정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얼굴 없이 몸뚱아리만 주어졌다면 인간들은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온 몸을 옷이 아닌 문신으로 채우고 벌거숭이 상태로 돌아다녔을 것이다. 얼굴이 중요하지 않았던 원시인들이 몸에 많은 문신으로 장식했던 이유일 것이다.
얼굴은 흰 스크린도 가지고 있지만 눈구멍이나 코구멍과 같은 검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검은 구멍은 자기의 정념이 표현되는 장소이다. 구멍은 주체화를 의미한다. 이런 검은 구멍이 없다면 사람들의 윤곽을 구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문제는 이 주체화의 구멍이 개인적 정념으로 가득차 주체화의 함정으로 작용할 때이다. 주체화가 함정으로 작용할 때는 이 구멍으로 자신의 정념만을 숨겨놓고 있을 때이다. 이 주체화의 정념은 거미줄처럼 자신의 덫에 걸린 사람들을 포획하여 동굴인간이나 괴물로 만들기도 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주체성을 표현하는 호수가 되어 상대의 영혼을 씼어 주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들뢰즈의 얼굴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진정성(authenticity)의 정의는 자신의 내면으로 상연해주는 자신 삶의 영화의 스토리와 외면으로 상연해주는 영화의 스토리가 같은 (True to oneself) 상태이다. 속에 다른 사람에게 숨겨야 하는 꿍꿍이가 스토리가 있다면 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공공의 영화관인 얼굴에 상연되는 영화는 잘 꾸며진 연기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 스토리가 같아져 연기하는 삶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진정성 있는 얼굴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얼굴에 상연하는 이야기와 자신의 내면에 상연하는 이야기가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성이 담긴 얼굴은 주어진 의미화와 주체화를 뚫고 나가 새로운 얼굴 풍경을 위한 되어감(becoming)이다. 되어감은 새로운 얼굴 풍경을 위한 얼굴의 탈영토화다. 얼굴의 탈영토화 작업을 통해 진성리더는 자신의 얼굴에 상연되는 영화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책임지는 총감독으로 태어난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문제는 얼굴 바탕의 흰 스크린에 표현되는 문제를 넘어서 얼굴의 눈이나 코나 입 등의 검은 구멍 속에 숨어 있는 정념의 주체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얼굴의 완성은 이런 구멍을 어떻게 성형해 내 삶의 스토리를 완성하는지의 문제이다.
진정리더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주체성의 구멍이 남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정념의 구멍이 되지 않게 성형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쓸 것으로 보인다. 정념의 검은 구멍은 아마도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초점이 사라진 무서운 눈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이 이런 정념의 검은 눈을 보여줄 때 악마와 대면하는 섬뜻함을 느꼈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정념의 함정에 빠져 산다면 나도 이런 눈을 주변에게 노출해 상대를 섬뜻하게 만들었을 개연성이 있다. 정념으로 가득 찬 눈을 가진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지만 진실된 얼굴성을 가진 부모들은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자주 눈을 마주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도 진성리더들은 자신의 제대로 된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목적에 대한 스토리로 자신을 실현시키는 일을 통해 정념의 구멍에 자신의 주체성이 함몰되는 것을 벗어날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실현했다고 해서 완전한 주체성이 실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나의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남들과의 관계성에 의존해야 한다. 목적을 매개로 자아실현이라는 주체성을 타아실현이라는 탈 주체성의 상태로까지 승화시켜야 주체성의 정념으로부터 완전히 탈주에 성공한 것이다.
적어도 인생의 삼막에 이르는 시점에도 자신의 얼굴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성형에 의지하거나 얼굴을 평평하게 펴는 보톡스에 의지해가며 사는 삶을 선택한다면 자신의 내면의 정념과 연출된 자신의 외면 사이에 협곡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나는 한번도 나에게 강요된 얼굴에서 탈주해 제대로 된 얼굴 풍광을 만들지 못한 사람이 된다.
나의 얼굴은 어떤 얼굴성을 가지고 있을까?
내 얼굴은 지금 어떤 영화를 상연하고 있을까?
나는 내 얼굴 표정에 책임지는 삶을 살고 있을까?
정념에 사로잡힌 악마의 눈은 누군가?
PS: 마지막 그림은 영국의 작가 베이컨이 얼굴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