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26 06:56
[N.Learning] 전공의 파업 무엇이 문제인가? 환대가 사라진 병원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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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파업 무엇이 문제인가?
환대가 사라진 병원
많은 사람들이 <슬기로운 의사생활> 드라마에 열광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병원(hospital)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였던 환대(hospitality)가 사라진 것에 대한 풍자였다. 병원(hospital)은 원래 환대(hospitality)을 위해 만들어진 성소임에도 이 환대의 사명을 가장 먼저 잃어버린 곳도 병원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울림을 주었던 것은 병원이 환대를 잃어버린 장소라는 것을 여기에 출연한 젊은 의사들이 연기로 각성시킨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우리는 환대는 고사하고 대부분 물건 취급을 받는다. 병원을 가도 우리는 고장난 기계일 뿐이지 아파서 고통받은 인간은 아니다. 고장난 기계도 등급을 먹여서 치료의 순서나 질이 결정된다. 환자체험이라는 고상한 말은 병원의 마케팅 전략일 뿐이다.
병원에서 환대가 사라진 이유는 신자유주의 교육시스템이 신봉하는 수능의 무한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만든 의사 엘리트주의와 정부 의료수가 정책과 정치가들의 포퓰리즘 의료정책이 합작해서 초래한 문제이다. 사명이 결여된 병원에 의료수가 정책이 침투해 환대행위를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최근 본인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3박 4일을 보냈다. 3박 4일을 지내가면서 환대는 고사하고 본질적 치료와는 상관없이 책정된 의료수가에 맞춰서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병원서비스와 병원의 의료 시스템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상황이 시급했음에도 외래로 약속없이 전임의에게 진료를 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먼저 전공의에게 진료를 신청하고 다음 단계로 수술이 가능한 전임의에게 진료를 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전임의에게 접근했지만 전임의에게 진료를 보는 시간은 3-4분을 넘지 못했다. 말그대로 난 고장난 기계였다. 이 전임의가 나를 통해서 최대한 챙기는 것은 비급여 검사 비용과 급여 검사숫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안 해도 되는 비싼 비급여 검사는 검사 순서의 첫번째로 배열했다. 이것을 거치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검사도 받을 수 없게 순서를 조정하고 있었다. 내가 굳이 경영학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병원 의사의 인센티브가 이렇게 과잉진료를 유도하도록 짜여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필요한 검사보다 엄청난 과잉검사가 이뤄진 후에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날짜에서도 이런 정부가 책정한 수가 정책을 이용해 과잉비용을 청구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하루 병원에 입원하면 퇴원할 수 있는 수술이었음에도 병원은 각종 이유를 들어 3박 4일 동안 머물 것을 권유했다. 결국 병상 수를 채우기 위한 의료수가가 이런식으로 책정이 되어서 바이탈 치료에 들어가야 하는 비용들이 엉뚱한 곳에 새고 있었다.
병원에서 환자취급을 못받는 이유는 사명이 거세된 병원과 의료시스템에 설상가상으로 상급병원과 하급병원의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고 병원 수가를 낮춘다는 명목으로 의사의 인건비가 책정되지 않고, 치료건수를 성과로 취급해가며 환자수나 검사 수에 맞춰 의료수가가 책정되는 문제 등 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개혁해나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였다. 생각해보면 대형 병원에서 환대가 사라진 이유는 사명이 거세된 틈을 타고 정부의 주먹구구식 정책과 병원이 이런 정책에 살아남기 위해 수가 시스템을 과용하고 남용하는 문제로 보였다. 주범은 의료수가를 조작하는 정부이고 사명을 잃은 병원은 정부명령을 집행해 이득을 챙기는 대리인이고 환자는 봉인 셈이었다.
나는 그래도 수도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바이탈에 관련된 수술에 접근하기가 쉽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 노인 분들이 생명이 위급하더라도 이런 복잡한 절차를 통과해서 질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면 아마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심각한 논란이 되고 있는 환대에 대한 지역적 격차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최근 우리 동네에 새로운 5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 입주자의 80%가 개인병원이다. 돈이 되는 각종 진료과가 다 있어서 1차 종합병원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다. 일년 후 이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전공의와 젊은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에 관해 우려하는 점이 이런 점일 것이다.
그럼 정부의 주장대로 공공의대를 만들면 환대의 지역적 격차를 줄이일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는 해결되겠지만 공공의대를 통해서 공급되는 지역의 공공 의료시스템의 질이 수도권 병원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냥 1차 진료소 숫자들만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정부가 이런 정책을 수립하려면 그런 질 높은 수준의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기반에 대한 청사진도 같이 제공할 때 그 심각성과 진정성을 믿을 것이다. 공공의료 시스템 속에서도 진료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정부의 이야기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된다. 진료는 여러 분야가 협진을 할 수 있을 때 수준높은 진료가 이뤄질 수 있을텐데 시설 및 간호사를 비롯한 수준 높은 협진 시스템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청사진 없이 그냥 공공의대를 설립하고 의대생을 늘리겠다는 정책은 필요성은 인정하더라도 실현가능성이 없는 탁상공론으로 들린다.
지금 의대생들이 주도하는 파업을 밥그릇 싸움으로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개업에 욕심을 내지 않고 병원에 월급의사로 취업을 한다면 적어도 의사들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밥그릇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주체가 주로 전공의가 중심이 된 학생들이고 병원장 협회와 간호사 협회는 파업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싸움은 젊은 의사들의 불안한 미래의 지위에 관한 정치적 싸움으로 보인다.
사실 공공의대 졸업생들이 많이 들어오면 지금의 전공의나 전임의들은 손해볼 것이 없다. 자신이 이미 차지한 지위를 후배들이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들간 더 치열한 경쟁을 해야하고 경쟁이 심화될수록 자신들의 입지는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란 자신들의 전문성이 사회의 생존과 번성에 어떤 차별적 기여를 하고 있는지에 따라 평가되고 분배된다. 공공의들이 늘어나면 이들이 월급은 적을지라도 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하는 바는 더 클 것이어서 이들이 지위가 지금의 젊은 의사들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고 더 존경을 받을 개연성이 높다. 젊은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이전처럼 평가되지 못하면 이들에게 지급되는 연봉이 오를 개연성이 없다. 기존 시스템 속에서는 의사가 연봉도 높고 사회적 지위도 높았던 반면 연봉도 상대적 지위도 불이익을 받을 개연성이 높다. 연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공공의들은 같은 의사로서 사회적 기여도 많이 하는데 연봉도 적게 받는다는 사실이 인용되어 이들의 요구를 무마시킬 것이다. 이점이 의대학생들의 파업을 전문직으로서의 의사 지위에 대한 정치적 싸움으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공의대의 설립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사들로부터 최소한의 환대를 받아가면서 진료를 받게 하는데 시발점이 될 수는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단지 시발점이지 제대로된 의료 환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문제도 많다는 생각이다. 공공의료 시스템의 질적 수준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 이에 관련된 시설에 대한 투자와 재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사적의료 시스템과의 분업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빌미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부 정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 바램으로는 공공의료시스템은 지역 주민들에 대한 환대문제를 넘어서 미래의 바이오 의료산업을 염두에 두고 플랫폼으로 계획되었으면 한다. 공공의료와 기초의학 연구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것을 의료산업이나 바이오 산업과 연계해서 바이오 의료산업의 생태계로 육성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한 공공의료 시스탬을 수도권 사적 진료 시스템에 아류가 아니라 미래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는 AI에 대한 진료와 로봇수술 등의 실험실로 운용한다면 기존의 의료 시스템과의 충돌을 줄여가면서 바이오 및 의료산업의 미래를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한번도 받지못한 의학노벨상의 진원지로 키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문구가 공공재란 용어다. 정부의 담당자가 의사를 공공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순수한 공공재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공공재였던 물도 비싼 가격에 사먹고 공기조차도 오염시켰을 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말 그대로 공짜 성격의 공공재는 없다. 다만 어떤 서비스가 공공재적 성격이 강한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국방, 재난, 초중등 교육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생명에 관여하는 의료서비스의 문제는 공공성이 강할 수밖에 없고 제한된 자원을 동원해 모든 국민들이 제대로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수혜자의 과잉 사용과 서비스 제공자의 과잉비용청구에 대한 규제가 작동해야 한다. 정부가 이런 규제를 잘못 남용해서 운용한 잘못도 있다. 지금 대형병원에서 환대가 사라진 대부분의 이유는 정부의 정책적 실수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정부가 코로나 팬데믹을 빌미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의대생들에게 십자군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잘못이다. 공공의료 시스템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사진을 마련하고 이 청사진이 우려하는 밥그릇 싸움내지는 이들간의 경쟁과는 무관한 것임을 이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어야 했다. 정부의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 잘못은 공공성을 내밀어가면서 함축된 의미는 신자유주의식 시장경쟁 냄새를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공공성이 강한 의료 서비스에서 파업으로 대응하는 것은 밥그릇만 챙기는 모습으로 해석될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의사들의 파업전력을 볼 때 이미 기득권층에 해당되는 자리를 잡은 선배의사들이 자신의 밥그릇과도 상관없고 명분도없는 파업에 심적으로 동조할리가 없다. 결국 이들의 집단파업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동이어서 국민적 지지세력도 없고 명분도 없는 지는 싸움이다. 특히 의사협회의 회장이란 사람의 전력에 대한 기괴한 평판이 학생들의 명분을 갈가 먹고 있는 형국이다. 의사가 제대로된 정책적 제언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제대로 된 거버넌스를 선출하는 일과 선배의사들의 리베이트의 의혹에 대한 자정 행위에도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이런 정치적 대응에 관해서는 약사협회가 훨씬 조직적이다.
표면적으로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싸움은 학생들이 나서야 할 싸움이 아니었다. 의료계 전체가 나서서 정부의 의료 수가정책이 가진 문제점이 의사의 환대행위를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지 환자를 어떻게 위험한 상황에 내모는지를 데이터와 사명에 근거해 소명했어야 했다. 또 다른 탁상행정으로 지금 우리가 목격한 괴물보다 더 기괴한 괴물이 탄생하지는 않을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의료시스템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아닌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것을 불쌍한 학생들이 아닌 선배 의사들이 나와서 나서서 막아야 했다.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선배의사들이 병원과 의료의 사명에 기반해 의료시스템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들의 사명을 복원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면 정부의 압력이 아무리 강해도 병원이 지금처럼 환대를 잃은 곳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극적 드라마가 아닌 사명에 따라 일상의 잔잔한 감동을 보여주는 일기의 한 페이지였을 것이다.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전공의들은 사명이 거세당한채 수능점수에 따라 의사로 육성되어진 신자유주의 교육이 낳은 희생자들일 뿐이다.
나는 지금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이런 신성한 사명과 책무를 방기한 기득권을 획득한 선배의사, 정부, 정치가들에게 돌린다. 병원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밑의 포스터의 주장처럼 의사가 사람인 것처럼 환자도 고장난 기계가 아닌 고통받는 인간으로 취급 받는 상식이 복원되는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3박 4일간 전혀 슬기롭지 못했던 병원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내가 만난 간호사 분들에게는 최소한의 환대의 온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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