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은 위기가 상수가 된 퍼머크라이스(Perma-crisis) 시대 연기하는 유사리더가 아닌 진실된 리더를 지칭하는 진성리더(Authentic Leader)는 어떤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있을까?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유사이래 모든 진실된 진성리더는 최소한 긍휼함과 존재목적을 자신에게 내재화한 리더를 지칭한다. 이들은 긍휼과 목적의 상호작용을 통해 약속한 변화를 혁신적으로 실현한다. 이들이 실현시키는 혁신과 변화는 누군가가 다그쳐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긍휼과 목적이 제대로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 여기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결과다.
진성리더에게 몸은 긍휼의 태반이고 존재목적은 이 태반에서 키워지는 정신의 씨앗이다. 진성리더는 존재목적이라는 씨앗을 자신의 긍휼의 태반에 수태시켜 이 태아를 다윗으로 길러내 목적에 대한 약속을 혁신적으로 실현하는 사람이다. 진성리더는 긍휼의 태반에서 잉태시켜 키워낸 목적만이 자신을 증거하는 진리로 성장한다는 것을 안다.
리더에게 목적의 태아와 긍휼의 태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진성리더는 긍휼의 태반을 선정할 것이다.
긍휼(Compassion)은 정서를 감성팔이 하는 수준인 공감(Empathy)과 위로(Sympathy)를 넘어 아픔으로 쓰러져 있는 자신과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원인의 수준에서 파악해서 쓰러진 자신과 타인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행동을 의미한다. 근원적 수준에서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면 공감이나 위로인지는 몰라도 긍휼은 아니다. 아무리 연기력을 발휘해서 공감과 위로를 표현하는 사진을 많이 찍어 배포해도 그냥 긍휼에 대한 천박한 연기일 뿐이다. 정작 사진으로 하는 코스프레는 장본인에게 긍휼의 잔고가 말라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행동이다. 리더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긍휼이 없는 상태에서 공감과 위로를 연기할 때이다.
긍휼(Compassion)이라는 말을 한층 더 깊이 분석해보면 이 단어 속에는 Passion(열정), Compass(나침반), Com(공동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Passion의 어원에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열정과는 달리 고통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열정은 고통을 해결했을 때 느끼는 희열을 의미한다. 성급한 사람들은 열정이 고통을 해결되었을 때 나오는 정서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희열만 채용해서 열정의 의미로 잘못 쓴다. 열정의 파이프라인이 고통의 관정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면 희열은 고사하고 그냥 텅 빈 수도관일 뿐이다. 젊은이들에게 무작정 열정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것은 잘못된 조언이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섣불리 숨기지 말고 고통을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고 고통의 정체를 이해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Passion 앞에 붙어 있는 Com은 고통을 해결하는 문제를 같이 해결한다는 의미다. 공동체라함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고통의 문제를 연결해 같이 해결하고 치유하는 환대의 결사체를 의미한다. 고통의 문제가 아닌 고통을 잊기 위한 진통제를 주거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결사체를 공동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냥 치료해주는 척하고 결국은 돈을 요구하는 이익단체일 뿐이다.
Compassion에 담겨있는 Compass(나침반)는 긍휼이 단순히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을 넘어서 올바른 방향(진북, 진실)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할 최고의 지침이라는 더 심오한 명령이 담겨있다. 진성리더는 정치적 편을 들어가며 남을 재단하고 편견을 휘두르는 것을 가장 위험한 행동으로 규정하지만 굳이 편을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긍휼감이 이끄는 방향대로 가장 아픈 사람의 편을 드는 이유다. 설사 존재목적이라는 태아의 씨앗을 알지 못해도 Compassion 속에는 Compass(나침판)가 들어 있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긍휼이 명하는 아픈 사람에 대한 치유가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긍휼감의 태반이 없는 리더가 공감이나 위로 등으로 마치 긍휼감이 있는 것처럼 연기할 수는 있으나 자신에게 배태된 씨앗을 진실이 담긴 근원적 변화로 키워내지는 못한다. 긍휼감은 고사하고 공감과 위로 능력조차도 없는 리더가 재능만 가지고 있을 때는 소시오 패스의 성향을 가진 독성리더가 된다. 이런 리더를 추앙하고 있는 사회는 사회적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소시오 패스급의 리더를 연구해보면 십중팔구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에 대한 긍휼감조차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이 현능한 정의의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솔로몬 대왕의 존재목적이었던 공정성의 태아가 솔로몬이 가진 긍휼의 태반에서 법적 판단을 넘어 공의로움으로 키워졌기 때문이다. 예수가 기독교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예수의 타고난 긍휼의 태반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이 양자역학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뉴튼의 지식이 아인쉬타인의 긍휼의 태반에서 통찰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명한 세종이 한글까지 창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타고난 총명이 백성을 향한 긍휼감 속에서 수태되었기 때문이다. 만델라가 흑백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긍휼의 공동체로 전환시켜 여기에 인간다운 삶이라는 존재목적의 씨앗을 잉태시켰기 때문이다.
비슷한 통찰은 기존 카리스마 리더십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리더십 연구는 카리스마 리더를 사적 카리스마(Personalized Charisma)와 공적 카리스마(Socialized Charisma)로 구분해왔다. 여기서 카리스마는 신이 특정한 사람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지칭한다. 카리스마에 대한 연구는 은총인 카리스마(Charisma)가 긍휼 속에서 수태될 때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적 카리스마(Socialized Charisma)로 길러지지만 탐욕의 태반에서 수태되어질 때는 독성이 있는 사적 카리스마(Personalized Charisma)로 자라난다고 설명한다. 존경받는 카리스마는 자신의 긍휼의 태반에 한 달란트의 카리스마(재능)를 수태시켜 수 만개의 카리스마 달란트를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나무로 길러낸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혁신은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인 목적의 씨앗을 자신의 긍휼의 태반에 수태시켰을 때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을 놓친 혁신자는 결국 어려운 일을 만나면 중간에서 혁신을 포기하지만 고통받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혁신가는 절대로 혁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긍휼은 아파서 쓰려져 있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긍휼이 리더가 그렇게 열망하는 혁신의 원천인 셈이다. 혁신의 샘물이 끊어진 회사는 구성원이 서로에 대한 긍휼감의 잔고가 마른 조직이다.
설사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도 긍휼의 태반이 없는 사람에게 진실의 씨앗이 수태되어 이것이 크게 발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긍휼의 따뜻함이 결여된 자궁에서 배태된 모든 것은 사산아로 뱉어진다. 현명한 사람들은 아직 형태가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이 긍휼의 태반에서 길러낸 신토불이가 아니라면 믿음을 주지 않는다. 이 속에서는 진리의 씨앗을 수태되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감이나 위로수준에 머무는 사람들보다 긍휼의 태반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사기꾼의 사기행각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다. 긍휼의 태반이 없는 리더가 내두르는 질책은 구성원에게 칼춤으로 작용하고 리더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긍휼의 태반이 없는 사람에게 높은 직책을 주면 이들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선택적 정의의 칼춤을 춰 사회적 참극을 일으킨다. 사회적 참극은 부메랑이 되어 반드시 장본인을 더 비참하게 무너트린다.
우리 사회 리더십의 문제는 공감이나 위로로 연기해 긍휼감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유사리더들을 리더로 세운 것이 문제다. 이들은 선거철만 되면 시장을 찾아가 국밥을 먹는 서민 연기를 하지만 표를 얻기 위한 정치공학적 코스프레일 뿐이다. 이런 코스프레에 넘어가 자신의 야망과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리더가 리더로 세워지는 것이 대한민국 리더십의 근원적 문제다. 이들이 리더로 세워지는 순간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내 힘있는 사람끼리의 정치적 연대에 몰입한다. 이들이 서민들의 성장의 아픔을 근원적 수준에서 공감하고 치유하고 해결하는 혁신가가 될 방법은 없다. 초뷰카시대를 맞이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리더십의 제대로 된 근원적 변화가 절실하다.
긍휼은 기독교에서는 사랑, 불교에서는 자비, 유교에서는 측은지심으로 모든 종교의 보편적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