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일절, 어떻게 부활시켜야 할까? 기억상실증의 연기자의 폭력 구글의 알파고를 설계해 지금의 AI 돌풍을 일으킨 사람이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다. AI에게 학습시켜 인공지능이 이세돌을 패배하게 만든 사건을 통해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음을 세상에 알렸다. 벤처로 시작한 회사를 구글에 M&A시켜 지금의 딥마인드의 토대를 만든 하사비스의 논문이 아래에 첨부된 "기억상실증을 가진 사람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라는 가설을 검증한 논문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은 과거를 잃어버렸다는 증거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면 이들은 미래의 보편적 가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실제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을 비교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잃은 사람들은 미래를 온전하게 상상해내지 못했다. 이들도 미래의 상상적 경험에 해당되는 단편들의 편린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이 편린들을 엮어서 의미 있는 통합된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마찬가지다. 기억상실증이 심화된 치매환자들도 미래의 비전과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주장이다. 연구가 함축하는 바는 이렇다. 과거는 미래를 상상해내는 날줄의 역할을 하고 이 날줄이 존재할 경우에만 미래가 이 날줄에 씨줄로 결합해서 온전하게 미래를 상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과거가 사라진 사람들은 미래를 생생한 그림으로 엮어서 상상적 체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과거를 온전하게 회상할 수 있는 정상적 사람들만이 과거의 경험을 날줄로 삼아 상상하는 미래의 편린들을 엮어서 의미있는 그림과 비전을 완성해냈다. 나는 정치적으로 보수편도 아니고 진보편도 아니지만 정치적 보수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미래와 과거를 이원론적으로 나눠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서 힘쓰자고 제안한다. 쓸모없는 과거를 밀어내고 미래에 집중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함축한다. 하지만 하사비스의 연구에서처럼 과거가 청소된다고 미래가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실한 과거로는 미래의 비전과 보편적 가치를 구성해내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생생한 비전은 과거의 경험이 날줄이 되고 가져와야 할 미래는 씨줄로 직조되어 현재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때 생성된다. 미래에 대한 생생한 비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협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미래를 만들 수 없듯이 과거의 도움없이 미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만들자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담고 있는 과거를 숨기기 위한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이고 이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것은 정치적 폭력이다. 과거는 미래를 의해 희생하고 잊혀져야할 대상이 아니라 학습하고 반성하고 치유해서 미래의 기반으로 살려내야 할 기억의 유산이다. 치유된 과거만이 새생명으로 부활해 현재에게 미래의 길을 보여준다. 이들은 왜 3.1절과 관련된 과거 행적을 이렇게라도 지우고 잊고 싶어할까? 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오랫동안 치매환자 연기를 하는 일본에게 파트너가 되자고 구애까지해가며 이들의 지원을 요청할까? 이들이 신성한 삼일절 행사에서까지 신식민 사관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는 누가보기에도 명백해보인다. 아마도 이들 조상의 친일행적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조중동이 걸려있고, 대통령 부친이 걸려있다. 일제시대에 고통받던 민초들과는 달리 부귀영화를 누려가며 구축한 기득권이 삼일절만 되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삼일절만 되면 자신들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득권에 대한 정당성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친일 보수세력에게 삼일운동은 우리에게도 민족의 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미래를 위한 부활사건으로 작용하는 진실된 과거가 아니다. 언제든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해 난동을 부릴 수 있는 사무실안의 코끼리이다. 자신들이 조용히 누려온 기득권의 사무실에 침입한 코끼리가 잠을 깨는 순간 자신의 기득권을 향해 어떤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 때문이다. 물론 일본과 전향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치매환자 연기를 하고 있는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까? 과거가 제대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성과 상처에 대한 치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일련의 잘못한 사건 사고에 대해 한 마디 반성도하지 않는 자신들의 행태에 대한 동병상린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본의 잃어버린 삼십년은 일본의 과거에 대한 치매환자 연기가 가져온 부메랑이었다. 중증 치매환자인 일본의 치유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치매환자와 결탁해서 보편적 가치를 만든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과거에 대해 반성하여 현재로 제대로 부활한 과거의 토대 위에서 미래는 제대로 설계될 수 있다. 과거를 숨기고 미래와 단절시켜 만든 세계관이 보편적 가치를 담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인간이나 사회나 조직이나 국가가 제대로 된 주체가 되려면 학습하는 죄인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과거에 대해 먼저 자복하고 학습할 수 있을 때 과거는 유산으로 부활해 현재에 오래된 새길로 접속된다. 과거도 현재에 접속되고 미래도 현재로 가져와 제대로 된 현재의 지평이 마련될 때 제대로된 세계관과 보편적 가치도 탄생한다. 과거에 대해 의도적으로 치매환자를 연기하며 과거의 과오를 숨기고 변호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보편적 가치는 고사하고 미래를 위해 비전과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앞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면 숨겨진 과거가 망령으로 살아 돌아와 물귀신처럼 발목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일절은 우리에게 미래를 위해 잊혀져야 기억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부활시켜 현재에 접속되어야 할 기억이다. 삼일절은 몸은 일제의 감옥 속에 있었어도 우리 민초들에게 민족 혼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도어스태핑에서 시작해 입을 열면 설화를 만들어내던 분이 이번에는 큰 설화를 자초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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