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초지의 비극이 우리를 덮쳤다
대한민국 리더십 과제
근대적 사회과학에서 현대적 의미의 사회과학이 탄생했던 것은 동물의 세계의 생존원리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먹고살기 위한 경쟁과 투쟁을 극복하고 공동의 운명을 조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질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였다. 이런 사회과학적 질문을 수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기된 게임이 두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다.
죄수의
게임은 범죄를 공모했던 두 죄수가 잡혀서 독립적으로 검사의 취조를 받을 때 가능한 경우의 수를 게임이론으로 풀어본 것이다. 예를 들어 죄수가 모두 자백하면 둘 다 5년의 형기를 받는다. 둘 다 끝까지 자백하지 않으면 범죄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명확한 정황만을 근거로 비교적 가벼운 1년의 형기를 마치게 된다. 문제는 검사의 플리바긴에 끌려 공범보다 먼저 자백하는 경우다. 검사는 먼저 자백할 경우 플리바긴으로 무죄로 방면해주는 조건을 달고 회유한다. 자백하면 자신은 무죄방면되는 반면 상대는 법정 최고 형인 10년을 받는다. 두 사람의 운명을 목적함수로 설정할 경우 서로 부인하는 경우가 최적의 솔루션이지만 개인적 이득을 목적함수로 하는 경우 자신이 먼저 자백하는 것이 최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목적함수로 세우고 이에 맞춰 전략적으로 행동한다.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자신이 살아야 다른 사람도 살린다는 주장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나도 남의 운명에 대한 생각의 여유는 없다.
범죄자가 범죄를 공모하는 경우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둘의 공동의 이득을 위해서 공모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공동의 이득과 개인의 이득이 충돌할 때 범죄자들은 당연히 먼저 자백하는 쪽을 선택한다. 둘 사이에는 의미 있는 사회질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범죄자에게 공동의 운명이나 목적을 기대하는 것은 발생자체가 무리한 생각이다.
Harding이라는 사회과학자는 공동의 목초지(Social Commons)를 상정해가며 두 사람 사이의 게임을 N Person 사회적 딜레마 게임으로 확대 제시했다. 게임의 상황이 범죄자들의 공모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초지에 자신의 소를 키우는 상황이다. 공동의 목초지이기 때문에 개인의 욕심에 따라 한 사람이 과도하게 자신의 소를 풀어놓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목초지 전체가 황폐화 되어 결국 모두가 망하는 상황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공동의 목초지를 위해서 자신이 풀어놓아야 할 소의 숫자에 대한 솔루션을 연구해왔다. 이런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 학자가 Nash이다.
이런 전근대적 사회과학의 문제는 공동의 목초지를 키우는 과정은 탐구하지 않고 목초지가 주어졌을 때 서로의 이득을 최적화하는 방식에 질서의 초점을 맞춘 것이 문제다. 목초지가 황폐화 되기 전에 목초지를 공동으로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플러스 섬의 게임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깨달은 사람이 먼저 목초지를 키워놓으면 이기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상황을 이용하여 더욱 번성을 누린다. 이런 현상을 보면 목초지를 먼저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은 바보짓을 한 것이 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보취급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 어느 순간 자신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결과는 사회질서의 붕괴다.
최근 ESG 운동이 벌어진 계기도 이기적 기업에 의해서 산성화 될대로 된 지구공동체가 결국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이기적 기업들이 먼저 깨달은 각성사건에 기반한다. 이윤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면서 원료를 채취해 상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과의 공존의 경계가 무너졌다. 이 틈을 타고 발생한 코로나라는 팬데믹에 의해 인류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냥 전초전일 뿐이다. 자연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코로나보다 더 큰 팬데믹이 지구를 삼킬 것이다. 지구가 사라졌는데 기업과 사람이 생존과 번성을 논의한다는 것자체가 허망한 것이라는 존재의미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ESG를 화두로 기업들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죄수의 게임이나 목초지의 비극의 문제는 문제에 대한 프래이밍의 차이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솔류션은 공동의 운명이라는 목초지를 변수화하지 않고 주어진 상수라고 생각하고 참여자들의 이기심을 얼마나 조율해야 결국 최적의 솔루션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제로섬의 문제로 생각해왔다. 이런 제로섬 방식의 질서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해서 지구를 극단적으로 초토화시켰다.
21세기 새로운 사회과학의 솔루션은 공동의 운명이나 공동의 목초지를 가꾸는 일을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전환해 플러스 섬으로 게임을 프래이밍할 수 있을 때 제대로 풀 수 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운명이라는 울타리를 현실적으로 인지하고 이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안에 목초지를 서로 가꾸는 일에 서로 협업하지 못하면 의미 있는 질서가 만들어질 방법이 없다. 공동의 울타리를 세우고 이 안에서 같이 참여해서 일하는 방식은 협동이 아니라 협업이다. 이런 질서에 대한 새로운 협업을 기반으로 한 발상의 전환이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수학자가 나서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해도 부분최적화한 솔루션을 도출한 것이다.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이 안에서 공동으로 목초지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면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둔 사람들의 행보가 바보의 행보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행보로 회자되고 이런 긍정적 피드백들이 커서셔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목초지에 울림이 있는 공동의 믿음의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리더가 해야할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한때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각성해서 광화문에 울림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여기서 만들어진 유산을 제대로 시대에 맞춰 공진화시키는데 실패했다. 이런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로부터 학습해가며 21세기 대한민국에 맞는 울림의 울타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국가를 이끄는 리더의 과제다. 번성하는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이런 울림의 울타리가 세워지고 지켜지는 모습에 감명받은 국민들도 한 두사람씩 더 참여해 울림의 메아리를 통해 웅장한 울림의 하모니를 만들어낸다면 21세기 세상을 이끌어가는 대한민국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될 것이다. 공동의 운명이 아니라 밥그릇 싸움으로 울림이 없는 시끄러운 잡음만 만들어내는데 주력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문제의 원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