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리더라면 어떻게 소통했을까
의료파업을 지켜보며
최근 의료파업행위에 대응해 정부와 대한의협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합의안을 만들어 놓자 젊은 의사회가 원점이 아니라 무효화라는 문구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나서서 공공의대 제도를 놓고 정부와 젊은 의사들간의 힘겨루기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환자가 없는 의사는 상상이 않될 것이다. 잠재적 환자인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데 의사들만 나서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의사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감옥에 갇혀 세상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집단사고에 뺘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공공의대와 지역의료격차 해소 문제는 시기와 잘 할 수 있는지를 조율하는 문제이지 이 자체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성이다.
시대적 명분에 대해 왜 젊은 의사들이 일반 국민적 정서에 반해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지 이유를 찾아보아도 명확하게 드러난 이유는 없다. 이들 주장에 간혹 비치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깔아 놓은 의료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 분석은 전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의협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이유로 내건 아래에 게시된 광고는 한 마디로 코메디 수준이다. 도대체 이들이 학교에서 일등에 대한 자기 나르시즘말고는 무엇을 배웠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의협이 낸 광고의 요지는 전교일등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것인가 공공의에게 받을 것인가를 국민들에게 묻는 형식이다. 한 마디로 경도된 엘리트시즘의 극치이다. 대부분의 의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한의협이 낸 광고는 이런 파업을 주도하는 정치적 의사가 결국 중, 고, 대학교의 사명이 게세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의대 갈정도로 달달 잘 외우는 학습 능력을 가지려면 그런 머리와 재력을 가진 부모 밑에 운좋게 태어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부모나 이런 부모 밑에서 의사가 된 자식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신이 자신을 대신해서 주사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무임승차하듯이 보탠 자신의 노력이 이 모든 의사로서의 성취를 만들었다는 주장하는 것은 나르시스즘의 극치이다. 제대로 된 의사라면 이런 머리좋고 재력이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지를 신께 감사하고 이 감사를 되갚기 위해 자신이 배운 전문성으로 그렇게 일등으로 교육받도록 격려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야할 했을 것이다.
이런 업과 사명을 짖밟는 대한의협의 광고가 젊은 의사들을 괴물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교일등할 정도 우수한 학생이 사명을 가지고 있다면 의사가 아니라 기초과학자가 되어 인류발전에 더 크게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운 일을 마다하고 굳이 자신들이 안해도 의사할 머리와 능력이 되는 사람이 많은데 경쟁에서 이겨 의사가 되었다는 잘못된 자부심이 지금과 같은 괴물을 만들었다고 본다. 국민들은 이런 파행을 보며 의료파업에 나선 학생들이나 전공의는 자신의 업이나 사명이나 환자에 대한 환대 개념조차도 없는 이기적으로 기술만 익힌 기능인이라는 생각을 굳힐 것이다.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의협이 나서서 스스로 차버리는 형국이다. 정은경 본부장 같은 존경받는 의사가 대한의협의 회장이 되지 못하는 의료계의 고질적 구조와 문화가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한다.
진성리더의 정부관료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만들었을까?
공공의대와 의료의 지역격차를 해소하는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맞는 답이다. 답은 맞지만 이 답을 받아들여 실현시키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답은 그냥 Text일 뿐이고 이 Text가 진짜 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Text와 지금 의료현실이라는 Text가 씨줄과 날줄로 만나서 Context(맥락)를 만들 수 있을 때만 현실이 된다. 이 context(맥락}을 주요 이해당사자들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을 수준이 되면 이것은 완벽하게 제도화된 현실로 굳어진 것이다. Text는 아무리 답이어도 현실이라는 Text와 만나 맥락(context)를 만들지 못하면 그냥 공허한 메이리일 뿐이다. 맥락(Context)이 만들어질 때 답으로 제시된 Text는 공명을 만들고 공명을 만들어야 추동력과 에너지가 생겨 결국 답이 당연한 현실이 된다.
지금처럼 코로나를 빌비로 공공의대을 관계당자자 중 한 그룹인 의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의사들을 체면을 차릴 쥐구멍도 안 만들어주고 몰아 세우는 고양이가 된 형국이다.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옳바른 이야기를 하는 고양이의 입장임에도 쥐에게 공격당하는 꼴이 되었다.
제대로 된 진성리더라면 주요 이해당사자인 의사, 지역주민, 국민, 다른 의료 종사자들이 어떤 Text를 가지고 있고 이 Text들이 묶음이 공공의대라는 Text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다리가 먼저 만들어져야 했는지를 분석하고 여기에 맞춰 context를 만들어가며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전략을 썼어야 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빌미로 자신의 Text로 의사들을 일방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로 몰아세우는 전략은 최악의 전략일 뿐 아니라 리더십으로 이야기하면 갑질이다. 가장 반대가 심하게 나올 당사자들을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같이 설득시키고 정부도 시스템의 개선을 의해서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를 설명해 이들에게 심리적 안정공간을 창출할 수 있어야 했다. 진성리더는 아무리 답을 가지고 있어도 이 답은 울림이 있는 맥락 (context)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실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정부는 공허한 메아리로 귀중한 공공자원을 낭비한 것이다.
진성리더라면 자신이 답(Text)를 가지고 있었어도 이것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울림을 창출할 수 있는 맥락(Context)를 만들어 의사 뿐 아니라 다양한 의료관계자들과 국민들을 향해 스토리텔링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