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상기시킨 것들
근원적 변화에 대한 열망
근원적 변화(deep change)냐 점진적 변화(incremental change)냐의 차이는 가정까지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지의 문제이다.
흔히 변화에서 타깃으로 삼는 것이 문제가 되는 행동이다. 이 행동을 수정하는데 가정을 건드리지 않고 수정할 수 있다면 이 행동변화는 점진적 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행동의 뿌리가 되는 가정까지 해체시켜야 행동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요구되는 변화는 근원적 변화이다. 근원적 변화가 요구됨에도 걸림돌이 되는 행동만 상벌 등의 제도적 장치의 가위를 도입해 잘라버린다면 그 비슷한 행동은 그 제도의 허점을 타고 옆에 독버섯처럼 자란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부동산 대책의 문제 같은 경우다. 부동산 정책이 부동산 공급에 대한 가정자체를 변화시켜가며 시행되어야 함에도 건설업자나 투기세력을 크게 자극하지 않은 범위에서 정치적 입지에 따라 결정되니 투기세력이 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더 기승을 부린다. 지금 부동산 정책은 투기세력을 학습시키는 정책들로 채워졌다.
가정이 해체되고 새로운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행동과 제도가 설계되어 실현되면 근원적 변화가 이뤄진 것이다. 근원적 변화가 완성되었는지의 문제는 지금 상태를 버리고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를 물어보면 된다. 점진적 변화의 경우는 마음에 안들면 가정의 방해 없이 옛날로 돌아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근원적 변화가 이뤄지면 가정을 이전의 낡은 가정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 변화는 일단 변화가 이뤄지면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를 지칭한다. 다이어트에 일견 성공했어도 요요현상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몸무게가 느는 것은 가정과는 상관없이 점진적 변화의 태도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요즈음 코로나 팬데믹이 초래할 변화를 읽는 태도에도 근원적 변화의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코로나가 극복되면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점잖게 예언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근원적 변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다.
코로나 이전의 사회와 이후의 사회의 차이는 분산사회(distributed society)와 집중사회(centralized society)간 차이다. 분산사회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유지해가면서 사회적 거리는 더 좁혀 조직이나 사회가 실현하려는 존재이유를 최종적 중재자로 설정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해 협업하는 거버넌스에 기반한다. 집중사회는 계층이나 팀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한 공간에 모이게 하고 이들을 리더의 지도하에 높은 목표를 정해놓고 일사분란 하게 뛰도록 강요하는 거버넌스다. 이 집중사회의 가버넌스를 움직이기 위해 평가와 보상과 경쟁의 HR 정책들이 전략적 HR이란 이름으로 도입된다. 보상과 평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조직정치가 작동한다. 조직 정치는 학연 지연 혈연 가정배경 성별 연결망을 기반으로 독버섯처럼 자라서 구성원의 순수한 열망을 좌절시킨다. 조국 추미애 같은 혈연을 동원한 연결망 신드롬이 주기적으로 불거져 구성원들의 선한 열망에 찬물을 뿌린다. 분산사회에서는 혈연적 가족이 부탁하는 일이라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설정한 목적에 반하는 일이라면 의사결정자는 혈연을 가족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분산사회가 지향하는 바는 구성원들이 진회시킨 사명과 목적에 대한 믿음이 최고 경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목적이 책임자를 임명하여 생길 수 있는 정치나 이해의 충돌을 중재하는 가버넌스로 삼는다. 다양한 전문성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공동의 운명으로 설정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업하는 운동장을 만들어간다. 구성원들은 목적에 대한 믿음과 전문성으로 기여한다. 이들이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연결망을 통해 조직정치를 작동시키려는 기득권층이다. 한 마디로 분산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적 연줄에 의해 자신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설정한 목적이 희생되지 않는 사회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열망하는 성숙된 시민사회의 모습에 대한 근원적 변화의 열망을 표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