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23 07:49
[N.Learning] 창조적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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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창조적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열역학 2법칙은 세상에 생산적 질서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설명해준다. 한 마디로 질서는 앤트로피가 감소하는 현상이다.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 무정형적으로 주어진 요소들을 조직하여 어떤 정형적인 패턴을 만들어야 한다.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이 질서패턴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를 만들어 열의 흐름에 따라 요소들이 정형화된 방향으로 정렬되게 만들어야 한다.
열역학 제 2법칙에서 운동이라는 동적 질서가 창출되는 원리를 생각해보면 쉽다.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의 차이를 만들면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되고 이 전달되는 과정이 패턴을 만들거나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 이것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둘 사이의 온도가 같아지면 움직임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온도가 같아져 결국 움직임에 패턴이 사라지는 현상이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이다.
질서는 온도 차이를 줄이는 움직임에서 일정한 패턴이 발견되는 것이므로 고정된 것을 질서로 이해하는 것은 심히 잘못된 이해이다. 모든 질서는 더 높은 에너지 상태가 더 낮은 에너지 상태로 움직여가며 만든 평형이다. 흔히 보수가 질서를 고착된 낡은 옛것으로 생각한다면 질서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동적인 것을 전재하지 않은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서도 이런 차이를 기반으로 한 엔트로피 법칙이 작용한다. 삶에서도 플러스 극과 마이너스 극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 둘 사이에 창조적 긴장이 유지될 때 질서 있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내 키가 지금 130Cm인데 180Cm로 장대하게 키우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임의적이기는 하지만 130의 상태를 마이너스 극으로 180의 상태를 플러스 극으로 생각해보자. 이때 130과 180사이의 간극 50Cm를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스파크가 일어나 창조적 에너지가 발생하고 이 간극을 줄여나가려는 자발적 행동이 일어난다. 이 자발적 행동이 동적 질서이다. 자발적 행동이 긍정적 결과를 산출하면 에너지는 다시 커진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키가 130cm라는 마이너스 극을 무시하고 180cm의 상태만 열망하거나 180cm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키가 130cm라는 것만 한탄하고 있다면 이 두 경우 모두 창조적 에너지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엔트로피만 증가하는 현상을 경험한다. 첫번째 경우는 아마 지나친 낙관주의자의 오류 때문일 것이고 둘째 경우는 지나친 비관주의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내 키가 130 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180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명확한 열망 모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키를 키우는 행동을 해나갈 수 있다. 열심히 키를 키워서 180Cm까지 만들었는데 다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온도차가 없어진 엔트로프의 증가를 경험한다. 도달했다는 신드롬에 빠져 있다가 무너지는 회사도 있고 큰 성취를 이룬 후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엔트로피 증가를 못 막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엔트로피는 권태이다. 권태가 생긴 이유는 삶의 의미있는 긴장을 만들어주는 플러스 극과 마이너스 극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창조적 긴장을 만들 수 있는 간극만이 엔트로피 증가를 막는다. 인생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의미있는 질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삶에 마이너스 극과 플러스 극의 간극을 통해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삶에서 과거는 마이너스 극이라면 미래는 플러스 극이다. 현재는 과거의 마이너스와 미래의 플러스가 창조적 긴장을 가지고 내 구체적 삶을 조직해 나가는 과정이다. 미래에 대한 열망만으로 과거를 억압하거나 미래도 없이 과거에만 빠져 있는 경우도 다 시간여행자로서 인간의 본질인 창조적 긴장을 무시하고 삶에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행동이다.
삶에서 현재의 수준을 이해하고 미래의 목표를 정하는 방식으로 플러스 극과 마이너스 극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모든 동기공식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심리학이 간과한 삶의 더 깊은 마이너스 극과 더 심오한 플러스 극이 있다. 내 존재의 마이너스 극은 과거의 시작점인 나의 탄생시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텅빈 채로 내 이름만 가지고 피덩어리 존재로 그냥 덩그러니 던져졌다는 참혹한 사실이 나의 긍극적 마이너스 극이다. 긍극적 플러스 극은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세상일을 정산할 미래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왜 살았는지 즉 나의 존재이유에 대한 답변인 목적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시점이다. 이 두 시점을 이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는 삶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원적 의미 있는 창조적 삶이다. 이와 같은 삶의 마이너스 극과 플러스 극에 대한 큰 그림이 빠진 상태에서 과거를 잊고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장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결국 이런 단기적 삶이 성공하더라도 삶의 의미보다는 삶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쪽으로 귀결된다. 근원적 플러스와 마이너스 극을 무시하고 단기적 성취를 위해 임의로 설정한 초단기적 마이너스와 플러스 극은 삶을 시지프스의 돌굴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열심히 사는데도 권태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정(Passion)이란 단어도 고통이라는 마이너스극에 해결이라는 플러스극으로 극복했을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플러스 극만 존재하는 열정은 없다.
어떤 사람이 내적인 에너지 상태를 창출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고 다른 사람이 이것에 자극받아 행동을 하고 이 행동이 원래의 사람들에게 되먹임(feedback)될 때 사회적 에너지가 창출된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식은 파장을 통한 울림이다. 사회적 에너지가 창출된다는 것은 울림이 되먹임을 통해 공진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에너지를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에너지의 흐름과 공진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원론적 진영론으로 서로의 공진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진영론과 양비론은 공진을 막고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사회적 질서와 사회적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는 원동력이다. 되먹임을 통해 울림이 없는 메아리는 소음일 뿐이다.
권태란 삶의 존재론적 플러스 극과 존재론적 마이너스 극이 사라진 순간 찾아온다. 창조적 긴장관계가 풀어져 삶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이 권태이다. 존재이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삶의 창조적 긴장과 동적 질서를 더해주는 최고의 여행이다.
니체는 의미있는 삶의 목적이라는 플러스극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태를 탈출하기 위한 모든 행동이 극단적 탈주, 해귀망칙한 짓, 마약중독을 일으킨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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