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란 어떤 행동으로 생긴 손해와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나에게 돈을 천 만원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못 받을 것을 각오하고 빌려주었다면 신뢰 잔고는 천 만원이다. 내가 친구에게 천 만원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친구가 못 받을 것을 각오하고 빌려주었다면 우리들 사이의 신뢰 잔고는 이 천 만원이다.

신뢰의 본질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을 넘어 상처를 받아들이는 용기의 문제다. 상처, 손해,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뢰란 말도 있을 리 없다. 보험이란 예상되는 손해에 대해서 고객이 예치한 돈으로 위험을 분산하는 형태다. 문제는 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손해는 빙산의 일각이고 보험으로 관리할 수 없는 손해가 빙산의 밑둥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신뢰란 재정적 보험으로 관리할 수 없는 신뢰를 사회가 암묵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 참석해 축의금을 내거나 장례식에 참석해 조의금을 내는 행위는 보험 회사가 해결할 수 없는 위험 분산을 사회 구성원들이 해결하는 사회적 보험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병원으로 이송을 도와주는 것도 사회적 신뢰의 잔고가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행위다. 살다 보면 예측하지 못하고 상처 받을 개연성은 넘쳐 나는데 신뢰잔고가 없어서 아무도 나서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사회는 인간 사회가 아닌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한다.

사회적 신뢰가 사라지면 불확실성과 위험이 극대화 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미래는 리스크가 본질인데 더는 이런 리스크를 제거해가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에 자신의 현금을 쓸 여유가 없다. 신뢰가 부재한 사회에서 미래는 없다.

구성원들도 회사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면 본인들의 기여분을 칼 같이 계산해서 현금으로 즉각적으로 받아내려 할 것이다. 고객이 회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회사의 제품을 믿고 살 수 없다. 회사의 지속가능성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회사의 미래와 신뢰를 파는 행동이다. MZ 세대가 공정성을 무기로 매번 계산기를 들이대는 모습은 공정성보다는 기득권 세력이 제안하는 미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임이 신뢰에서 중요한 이유는 책임은 잘못을 받아들임을 통해 자신이 상처 받을 개연성을 인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떤 손해가 발생했을 때 이 손해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신뢰 기제가 붕괴된다. 이런 점에서 꼬리 자르기는 신뢰를 파괴하는 핵폭탄이다. 꼬리 자르기한 장본인은 당장은 살아 남았는지 모르지만 신뢰 잔고가 파산이 나서 결국은 존재로서 영향력을 잃는다.

책임이 있는 자들이 책임을 방기하고 꼬리 자르기 전술을 구사해가며 자기 살 길만 도모할 때 이들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구성해주던 신뢰의 뚝은 무너진다. 한 장병의 사망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단장을 두고 대통령이 나서서 "이런 일로 사단장이 처벌 받으면 누가 사단장을 하냐"고 꼬리 자르기를 한다면 국민이 국가에 가지고 있는 신뢰의 뚝 전체를 한꺼번에 무너트린 것이다.

장병들은 상처 받아도 책임 있는 장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국가에 실제 전쟁이 나면 어떤 장병도 장성을 신뢰하고 전투를 수행할 리 없다. 전투 중 부상 당한 병사를 두고 사단장이 먼저 도망간다면 사단장을 믿고 사단장을 위해 싸울 병사는 없다. 베트남 전쟁 시 평소 책임과 신뢰를 져버린 장교들이 총탄이 오가는 상황에서 병사들에 의해서 많이 사살 당했다는 비공식 보고가 있을 정도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의 위험에 대해서 공유된 책임을 방기 한다면 국가는 이미 신뢰를 잃은 것이고 신뢰를 잃은 국가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에 대해 책임지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책임지지 못한 희생에 대해 꼬리 자르기를 한다면 국가 신뢰는 파산선고된 것이다. 국가가 더는 국민에게 의무와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모든 의무 행위에 대해 국가는 돈을 지급해야 한다. 국가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은 국가에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책임을 꼬리 자르기 하는 사람들이 신뢰의 어음을 부도낸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같이 상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