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7-30 12:13
[N.Learning]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에 대한 분별 성경 문해력 요청서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351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에 대한 분별
성경 문해력 요청서
일전에 한 교회의 목사님과 기독교가 왜 이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많은 가나안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문제에 공감하신 목사님은 기독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양적 성장이라는 개념을 내려놓고 질적 성숙을 위해 갱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제안하셨다. 본인은 평소 영향력이란 자신과 남을 변화시킨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라고 설파하던 바여서 크게 공감했다. 누구든 무엇이던 변화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대한민국 인구가 급증할 때 기독교가 신자유주의와 연동한 기복주의 방식을 채용해서 양적 성장에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이 인구와 교인 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양적 성장은 신화일 뿐이다. 이런 신화를 아직도 유효한 현실로 생각하고 교회를 경영한다면 교회가 교회를 몰락 시키는 우로보러스를 초래한다. 우로보러스는 뱀이 비현실적으로 배가 고프면 자신의 꼬리를 먹어서 허기를 채우는 현상이다.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고 믿음이 떨어질 수록 개인 신자들은 큰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결국 작은 교회에서 이탈한 가나안 교인들이 대형교회로 이동하는 우로보러스가 촉진된다. 우로보러스는 기독교의 생태계를 무너트려 큰 교회도 종국에는 몰락하게 만든다.
성경이 처음 써졌을 때는 따지고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 말씀을 나침반으로 장착한 가장 최신의 강력한 내비게이션이었다. 나침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음성이라면 내비게이션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여행 지도를 만들어 성경이라는 글로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모범적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있던 선지자나 예수의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이 이들의 행적을 글로 적어 정신적 지도로 만든 것이 성경이다. 성경의 스토리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나침반과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지도인 내비게이션이 동시에 포함된 것이지만 특정 시대에 집중적으로 정리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나침반의 속성보다는 내비게이션의 속성이 더 크다.
문제는 누군가가 처음 글로 정리한 내비게이션도 세상이 바뀌면 바뀐 세상에 맞춰 나침반을 다시 꺼내 시대와 지형에 맞게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때는 열심히 세상을 공부해서 최신형의 내비게이션을 만들어 세상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성공을 구가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변화했는데 성공에 취해 변화한 세상에 맞춰 자신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는 것을 게을리 했다면 오히려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가 된다. 이 사람이 처음에 운용했던 강력한 내비게이션도 세상이 변하면 점점 유용성이 떨어진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내비게이션은 저절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업데이트를 게을리하면 내비는 유용성이 현격하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지금처럼 변화가 상수가 된 세상일 때 더욱 그렇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하는 일을 게을리해서 오랫동안 옛날에 만들어 놓은 내비게이션으로 서울 거리를 찾아 나선다고 가정해보자. 당연히 내비게이션이 안 맞아 떨어지고 사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은 위험한 곳이니 이제부터는 아는 길로만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다. 하지만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해서 아는 길도 점점 사라진다. 자신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점점 사라지면 결국 자신은 내비게이션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내비게이션에 갇혀 살게 되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조차도 이 상자 속의 감옥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심지어는 내비게이션의 감옥이 더 안전하다는 자기 기만 논리까지 개발해서 스스로가 감옥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독하는 간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자신이 만든 내비게이션이라는 감옥의 죄수가 되기도 하고 간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는 자기 기만에 도달한다.
한 때 교회를 성장시켜서 전설적 영향력을 획득한 대형 교회의 목회자 분들 중에도 오랫동안 본인의 네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하지 않아 오히려 본인이 만든 내비게이션 우상화에 빠진 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어느 순간 상식적이지 않는 이야기를 설교하기 시작한다. 이 분들 주위로 상식적이지 않은 비현실적 사건들이 발생한다. 성장을 우상화하던 내비게이션에 갇혔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오랫동안 업데이트하지 못한 내비 때문에 나침반도 죽어서 떨림을 멈춘 것이다.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떨림을 멈춘 나침반을 감추는데 사용된다. 목회자로서 나침반이 죽어 떨림을 멈춘 것을 각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비게이션을 강요하고 우상화하는 일에 몰입한다. 내비게이션이 죽은 나침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성경 속 하나님과 예수님이 음성이 들려주는 나침반의 극성을 세우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하기보다는 우상화한 내비게이션 감옥에 갇혀서 간수와 죄수의 역할에 헌신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말만 선택적으로 인용해가며 자신의 내비게이션이 문제가 없음을 변호한다. 자신이 인용하는 낡은 성경의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세상이 변화하는데도 자신이 가진 지도를 업데이트하지 못하면 아무리 총기가 넘쳐도 길을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 도달할 수록 하나님과의 단독자의 관계로 나침반을 극성을 세우고 자신의 낡은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문한다. 성경 속에 하나님 말씀이라는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길을 잃었을 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지도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울림이 있는 새 내비게이션을 만들 능력을 잃는다. 성경의 내용 중 나침반에 관한 내용과 오래 전에 만들어낸 내비게이션의 내용을 분별할 수 있는 문해력이 없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시대적 소명을 들려주기보다는 우리를 시대적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성경의 문해력이란 성경 내용 중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지켜야 할 하나님과 예수님 음성인 나침반과 반드시 변화시켜야 할 내비게이션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이 전한 "나는 매일 죽는다(고전 15: 31)"는 고백은 육신의 죽음과 영적 부활의 통해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해가며 사는 삶을 기도한 것이다. 일신우일신을 뜻하는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도 같은 맥락의 고백이다. 예수님의 목소리와 가르침을 직접 듣지 못한 사도로서 직접 음성으로 말씀을 전수 받은 사도보다 자신이 네비게이션에 갇힐 개연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스스로 각성한 것이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나침반 작업을 통해 가장 최신의 내비게이션을 만들어 기독교를 정초하는데 기여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매일 다시 죽었다 살아나는 무한의 부활을 통해 내비를 업데이트 해줄 것을 주문했다. 바울이 자신의 시대와 장소에 맞게 업데이트 시킨 13권의 지도가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살아 생전의 무한 부활에 대한 믿음은 후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다시 부활해 현대 철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바울이 주문했듯이 매일의 죽음과 매일의 부활을 통해 성경을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 해가며 새로운 내비게이션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기독교가 무너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내비게이션을 매일 업데이트 하는 갱신을 끌개(Attractor)로 삼고 이 갱신을 통해 얻어낸 교회와 신도의 질적 변화를 양적 성장을 대체하는 지표이자 밀개(Reinforcer)로 삼는 교회 거버넌스의 개혁이 없이는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전 교회가 협업해 새롭게 드러나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내비게이션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도 없다.
교회가 시대에 맞춰 이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성경 안에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을 분별해내는 문해력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가 유일한 희망이다. 성경 안에 나침반의 극성을 살리고 내비게이션의 내용을 분별해 자신 삶을 변화시키는 훈련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화한 자신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밀알로 제공해 더 많은 변화의 알곡들이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변화의 밀알이 되어 남들의 성공을 크게 돕는 사람이 지금과 같은 초뷰카시대 신실한 기독교인의 인재상이다.
교인의 수가 아니라 이런 삶이 꽉 차지는 변화를 경험한 성도 수가 성령이 실제로 임한 증거다.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이 만명이어도 이런 성도가 한 명도 없다면 교회는 텅 빈 것이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