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5 04:01
[N.Learning] 삼원학습 triple loop learning 학습원리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5,705  
   삼원학습 저술초고.hwp (117.0K) [47] DATE : 2009-07-15 04:01:14

      내가 살았던 미국의 아주 작은 도시에서 한번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학원교육 일 번지 강남 대치동 교육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황당무계한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서울 대치동에서 자식을 미국에서 조기 영어교육 시켜야 갰다는 일념하나로 오신 분인데 이 분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하루는 학교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고자질을 한 것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공부는 안 시키고 매일 놀리기만 한다고. 아이를 조기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개인의 삶의 상당부분을 희생해가면서 미국에 온 이 아주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애를 앞세우고 학교로 당장 찾아 갔다. 운이 없어서 선생을 잘못 만났다고 굳게 믿고 선생님께 다짜고짜로 따졌다. 멀리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유학 왔는데 왜 공부는 안 가르쳐주고 쓸데없이 애들을 매일 놀게만 하느냐고? 좋은 학원에서 외우기 경쟁해서 시험지에 누가 더 잘 쏟아내는지의 시험성적 올리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교육으로 믿어온 아주머니의 생각으로는 애들 선생님이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건의 결과는 굳이 쓰지 않아도 독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지금까지 남들에 비해 이만큼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보라면 마땅한 이유는 없는 것 같고 단지 운 좋게 교육열이 높으신 유복한 부모님에게 태어나 어려서 부터 남보다 더 좋은 과외선생에게 과외공부를 받은 것 밖에는 더 설명할 길이 없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교육선진국이라는 나라의 교육시스템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부모 사랑의 대물림을 역시 족집게 과외나 좋은 학원에서, 조기유학에서 찾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의 공부는 대부분이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는 문제해결 중심의 행동학습 형태로 진행된다. 한국의 학원에서의 암기위주의 공부만이 진정한 공부라고 믿고 있던 초등생과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이것을 순전히 공부 안하고 노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수학시간에도 수학공식을 외우는 것보다는 원리를 이해시켜서 이를 실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학습목표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수학공식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갑갑한 일이다. 그 시간에 수학공식 몇 개를 더 외웠더라면 시험을 더 잘 볼 것이라고 한탄을 한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초, 중, 고에서 하는 수학을 보면 정말 갑갑해 미칠 지경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원리를 파악해서 실제응용 능력까지 습득을 하면 이 원리를 여기저기 모든 상황에 창의적으로 적용시키는 능력의 파워를 목격하면 또 한 번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한국의 외고나 과학고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에세이 잘 쓰고 SAT 잘 받아서 어떻게 해서든 아이비리그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처음에 반짝 끗발을 보이다가 결국 전인교육 경쟁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거나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끝나는 현상도 결국은 단기적인 경쟁을 위한 경쟁에 교육의 모든 것을 올인하고 있는 한국교육의 당연한 결과이다. 더 배우고 더 나아지고 더 성숙해지기 위해 평생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단기적으로 시험점수를 높이는 기술을 배우기 위한 공부, 남을 도와주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을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소위 초 일류급이라는 고등학생들이 이처럼 국제무대에서 죽을 쓰게 만드는 것이 굳이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 잘한 학생들의 잘못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왠지 우리나라는 아이들 교육시키는데 헛발질만 하고 있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조건 초단치기로 시험만 잘 보면 의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교수도 될 수 있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연륜이나 경험이 전혀 없이 법조문만 잘 외워서 우수한 성적으로 판사가 된 새파란 젊은이가 자신보다 그 일에서 몇 배 더 경험을 가지고 연륜이 있는 사람을 사법의 잣대로 판단하게 하는 것을 정당화 시켜주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는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물론 몇몇 훌륭한 검사도 있겠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영혼이 없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고 국민들에게 항상 욕을 먹는 검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건을 다루는데 이분들의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비상식적 행태를 욕해도 사실 이분들이 무슨 잘 못이 있을 것인가. 우수한 사람을 그 정도로 밖에 길러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교육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건강한 교육시스템 자체가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 소위 사회 엘리트라는 분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달달 외워서 시험만 잘 보면 누구나 좋은 대학 들어가서 전문가로 사회의 엘리트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나라에서는 교육에 대한 희망이 없다.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하던 자기들끼리 진골 성골을 따지며 차별하는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희망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한국처럼 어떤 대학을 들어갔는지가 평생의 멍에이자 명예로 작용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소위 일류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빛나는 졸업장을 기반으로 평생 울어먹는 랜트시킹으로 안정적으로 사는 반면 이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중간에 어떤 성공을 거두든 상관없이 졸업장을 평생의 멍에로 지고 살아야 한다. 21세기 정보화 대국을 이끄는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분도 대국민 선언을 통해 교육을 통해서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 버리자는 발언을 하는 나라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의 생각에도 교육의 목적이 교육을 통한 미래 비전의 구현이라기 보단 랜트시킹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조차도 교육의 목적과 비전을 보지 못하는 나라에서 과연 어떤 희망의 불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성의 망망대해에서 젊은이들에게는 달리 대안도 없어서 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확실히 수치화된 점수로 보여 줄 수 있는 각종 스펙 쌓기 경주에 올인한다. 문제는 화려한 스펙으로 중무장하고 취업한 학생들이 회사에 들어가서는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에 나가서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기여를 할 수 있는가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부의 목적이라기 남보다 더 화려한 스펙을 어떻게 단시간 내에 쌓아 올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공부의 목적으로 전치되어서 이들의 화려한 스펙은 직장을 잡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학원에서 점수 따는 기술을 익혀 토익이 900점을 넘어도 말 한마디 못한다. 감히 누가 열심히 공부한 죄밖에 없는 이들을 욕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아직도 굳게 믿고 부추기는 어둠의 힘이 더 문제이다. 기득권을 장악한 사회의 엘리트란 사람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이 먼저 세워놓은 줄에 다른 사람들도 서도록 강요하는 음모가 더 문제일 것이다.

 교육의 부실은 사회 모든 영역에 편재되어 있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산업체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담당자들도 평가에 대한 압박 때문에 조직이 원하는 인재를 길러냈는지의 평가보다는 손쉽게 도입해서 쓸 수 있는 초보적인 강사만족도만을 고집한다. 이 같은 관행은 교육은 교육이고 일은 일이라는 기득권층의 이원론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게 되고 실제로 산업교육현장에 들어가서도 별로 달라지는 바가 없다. 학습목표와는 상관이 없는 강사만족도에 대한 평가점수에 대한 집착은 강사들을 모두 코미디언이나 만능 엔터테이너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산업체 강사들 중에 나름대로 인기 있는 강사들 간에는 누가 어느 강의에서 강의만족도에서 만점 맞았다는 이야기가 영웅담처럼 돌아다닌다. 교육내용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육성에 부합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트릭을 써서 만점인 5점에 근접한 점수를 맞는가가 더 중요한 목표가 된지 오래다. 산업교육은 바로 산업교육을 담당하는 회사의 교육담당자들이 다 망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순간에도 산업교육 담당자들은 어디 누가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없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강사들은 남이 공들여 만든 것을 베끼는 것을 강요당하게 되고 이런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시장에 유통되는 프로그램은 어느 시점이 되면 거의 대동소이해진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생각은 회사가 잘 돌아갈 때 하는 배부른 입발림이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회사가 어려운데 무슨 교육이냐고 몰아세우며 전 직원들을 영업사원화하기 혈안이 되어 있는 경영자가 존경받는 경영자로 받아들여지는 한 교육과 일을 통합해 국제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먼 다른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기업교육을 담당하는 실무자들의 세계 컨퍼런스인 ASTD에 가면 미국인이나 캐나다인 다음으로 한국인 교육담당자들이 숫자가 더 많지만 이들의 배우려는 노력만큼 한국기업교육은 해가가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성공사례도 없다보니 한국기업의 교육사례를 발표한 기업이나 학자들은 몇 년이 지나도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다. 각 국가의 산업교육 경쟁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있다면 욕을 많이 먹는 대학교육 만큼이나 우리나라 산업교육의 부실이 적나라하게 들어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펴던 선교사들로부터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가 있다. 아프리카의 한 족장이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족장이 달리던 걸음을 갑자기 멈춘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달리기를 멈추고 기도를 하고 있는 족장의 행동이 궁금했던 선교사는 족장이 기도를 다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물어본다. 왜 갑자기 달리기를 멈췄는지? 이 질문에 족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눈초리로 잠시 머뭇거리어다가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이 지금까지 너무 빨리 달려와서 자신의 영혼이 자신을 못 따라온 것 같아서 영혼이 자신을 따라 잡을 때까지 기다려가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한국의 교육의 부실을 풀 수 있는 해답은 이 족장의 이야기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모두는 교육을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자원을 쓰고 제도를 만들고 했지만 교육을 교육답게 해주는 영혼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제도학파의 주장대로 교육을 실현시키는 제도와 관행들이 교육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시시각각으로 도입되고 폐기처분되는 과정에서 교육에 대한 진정한 욕구를 왜곡하고 무늬만 교육인 한국교육의 현주소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교육의 본질과는 관련이 없는 껍데기만을 갈아치우는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한국의 교육은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주도아래 벌거숭이 임금님으로 변해 버렸는데 누구도 먼저 나서서 임금님이 벌거숭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본 저서의 작업은 참여한 집필자 모두가 한국에서의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문제를 땜빵 식으로 덮기보다는 아프리카 부족의 족장처럼 우리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고 이 공감을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본 저서를 통해 저자들은 앞에서 열거한 우리사회  교육시스템의 대다수의 문제점을 일원학습 single loop learning에 집착한 결과로 진단할 것이다. 일원학습의 함정에 빠진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를 구해내기 위한 대안으로 이원학습 double loop learning과 삼원학습 triple loop learning의 원리를 제시해 보고자한다.


삼원학습의 원리


본 저서를 통해 저자들은 우리사회에 다양하게 편재해 있는 교육시스템의 대다수의 문제점을 일원학습 single loop learning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해결점을 이원학습 double loop learning과 삼원학습 triple loop learning의 원리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일원학습은 교육의 전략이나 전술 스킬을 강조하는 knowhow의 학습인 반면, 이원학습은 행동과 행동, 태도와 태도, 행동과 태도 등간의 갭이 있을 때 이 갭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원리를 찾아서 바꾸는 knowwhy의 학습원리이다. 마지막으로 삼원학습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새로운 맨탈모형을 구축하고 이것을 통해 현재 행동과 태도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암묵적 맨탈모형을 들추어내고 이 둘 간의 창조적 긴장관계를 줄여나가는 방식의 학습원리이다. 한 마디로 삼원학습은 일원학습의 knowhow와 이원학습의 knowwhy를 맨탈모형의 확장을 통해서 통합해가는 원리로 학습을 제시한다. 일원학습과 이원학습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진 학습모형이고 본 저서에서는 이 원리를 확장한 새로운 학습원리인 삼원학습의 원리에 집중하고자 한다.

삼원학습은 학습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 삼원학습에서는 학습을 성장과 같은 개념으로 규정한다. 학습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험성적이나 단기적인 성과향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괜찮은 사람에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 회사라면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 되는 것이, 사회라면 모든 다른 사회의 역할모형으로 회자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궁극적인 성장의 정점을 학습의 목적으로 규정한다. 삼원학습은 모든 사람, 조직, 사회가 이런 학습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 삼원학습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미시적 학습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이것이 학습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적절한 수단적 가치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판가름한다. 즉 젊은이들이 올인하고 있는 스펙에 대한 몰입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의 측면에서만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고 본다. 성장에 기여한다면 이 학습의 형태가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던 현업에서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던 삼원학습에서는 모두 건강한 학습으로 규정한다. 교육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 학습목적에 대한 믿음이나 방향을 상실할 때 세련된 교육의 스킬만을 최고의 교육으로 생각하는 일원학습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본다.

삼원학습의 두 번째 가정은 굳이 평생교육이라는 말을 빌려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원학습에서의 학습은 태어난 순간에서 죽는 순간까지 생기는 모든 바람직한 변화로 규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중요한 학습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원학습에서는 학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진정한 학습이 시작된다고 가정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교육의 최종적인 평가는 죽는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본다. 조직의 경우는 조직의 비전에서 설정한 시간적 단위에 도달했을 때 그 조직이 어느 정도 처음 비전에서 의도한 만큼 성장했는지가 학습의 중요한 단위이다.

삼원학습을 이끄는 세 번째 가정은 학습에 대한 진정한 동력은 외재적 보상보다는 내재적 성장의 기쁨에서 생긴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에게 혜안이 있어서 지금이나 10년 후에나 똑같은 사람 똑 같은 처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깨달은 누구든 살고 싶은 열정을 잃어버릴 것이다. 삼원학습의 원리는 학습을 통한 성장의 즐거움이 사람들과 조직이 학습에 몰입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학습을 통해 오늘 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정진하고 이 과정을 통해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적 체험과 이를 통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통제감의 확장이 학습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가정한다. 삼원학습에서는 많은 교육의 문제점들이 이 원동력을 무시한 채 외재적 보상에 주로 근거해 학습을 왜곡시킨 결과라고 규정한다. 내재적 성장에 대한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외재적 보상에 근거한 학습은 학습자들을 피동적으로 만들고 장기적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키게 된다고 본다.

넷째, 삼원학습에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맨탈모형이라는 정신적 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삼원학습에서는 이 맨탈모형이 바로 학습의 핵심적 기제라고 본다. 본 저서 2장에서는 이 맨탈모형의 속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사람들의 말, 행동, 태도 등등은 모두 맨탈모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 행동,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 결국은 이것이 뿌리를 박고 있는 맨탈모형이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삼원학습에서는 행동과 태도의 근원이 되는 맨탈모형이 고쳐질 경우에만 근원적 학습이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삼원학습에 맨탈모형이 수정되지 않은 태도나 언행의 수정은 근원적 학습으로 보지 않는다.

다섯째, 삼원학습에서 맨탈모형은 다양한 수준에서 공유되어 다양한 수준의 학습을 이끈다고 가정한다. 즉 팀원들 간에 공유되면 팀 맨탈모형으로 팀의 학습과 성장을 주도하는 원리가 되고 조직수준에서 구성원들 간에 공유될 경우 조직의 맨탈모형이 되어 조직이 운영되고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더 높은 수준에서는 한 국가에서도 국민들 사이에 공유된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지침이 있다면 사회의 맨탈모형이 될 것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나 조직의 성장은 바로 이 맨탈모형의 성장과정이 될 것이다. 맨탈모형은 공유된 단위에서 그 구성원들이 세상을 한 방향으로 이해하는 눈이 되고 조율된 행동을 하게 하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은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 공유되고 있는 암묵적 맨탈모형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원학습에서는 동물과 달리 인간학습자들은 시간여행자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시간여행자로 인간은 현재, 과거, 미래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과거로부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변을 돌아보며 배울 수도 있고, 미래의 자신과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며 배울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삼원학습은 행동주의 학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행동주의 학습의 전제는 과거의 시행착오 경험에서 사람들이 학습한다는 가정이다. 과거를 통한 학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만 만족하면 된다. 즉 외우는 것에 근거한 학습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등동물인 인간은 감정을 통해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학습할 수도 있고 미래를 상상해가면서 학습할 수 있는 고차원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이 고차원의 지능에는 물론 암기하는 초보적인 능력 뿐 아니라 추론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포괄적 인지적 능력, 상대의 마음을 읽거나 맥락을 잘 파악하는 감성지능, 큰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여 이용할 수 있는 문화지능,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학습하는 관계지능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원학습은 기존의 일원학습이나 이원학습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일원학습은 기존의 행동전략을 바꾸는 방법 즉 knowhow에 치중한 학습이다. 즉 영어단어를 외울 때 단순히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을 쓰고 있었는데 소리 내어 읽어가며 동시에 쓰기도 하는 방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기존의 방법을 버리고 이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면 된다. 이와 같은 학습이 일원학습이다. 학원이 인기가 있는 것은 결국 시험 잘 보는 knowhow를 훈련시켜서 경쟁에서 이기게 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학원은 일원학습의 대가인 것이다. 이원학습은 원리와 실천, 원리 간, 실천 간의 갭을 찾아서 메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원리를 터득하는 knowwhy에 근거한 학습이다. 갭은 종종 실수의 형태로 피드백 되는 데 이런 점에서 이원학습은 실수를 통한 학습이라고 규정되기도 한다. 즉 처음의 실수를 만회해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서 실수를 안 하게 되었다면 이 학습자는 행동과 이론 간의 숨겨진 고리인 원리를 깨달은 것이고 이점에서 이원학습을 잘 하고 있는 것이 된다. 기존의 많은 학습이 실수를 숨기고 실수를 안 하기 위한 학습을 학습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이원학습에서 이야기 하는 실수의 잠재력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원학습에서 실수는 더 근원적인 원리에 접근해 나가기 위한 비밀열쇠이자 학습의 숨은 보고이다. 이원학습의 결과는 더 깊은 원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원학습이 지속되면 자신이 세상을 보는 시각들이나 패러다임이 조금씩 깊어지고 포괄적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바로 이원학습의 세상을 이해하는 knowwhy를 고쳐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삼원학습은 조직이나 인간이 철드는 원리를 이용한 학습이다. 이원학습을 꾸준히 지속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인 know why들이 조금씩 수정이 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세상을 보는 맨탈모형자체가 너무 협소하여 찢어지는 느낌을 얻게 된다. 사람에게 말하면 철드는 순간이다. 옷을 입고 있는데 몸이 조금씩 커져서 꽉 조이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옷이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보는 지도를 구성하고 있는 맨탈모형이 그간 새롭게 터득한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담기에는 너무 작아서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철이 드는 순간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나 조직은 이처럼 철이 드는 순간을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는데 위인전에 나오는 위인들이나 100년 200년 영속하며 세상에 족적을 남기는 조직들은 이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이들은 이 각성의 순간을 고양시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맨탈모형의 변화를 이끌고 새로운 패러다임, 자신이 평생을 살고 싶어질 만큼의 매력적인 정신적 성전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들은 새롭게 형성한 맨탈모형을 토대로 현재의 삶과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성찰하고 이 성찰과정에서 파악된 현실과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간의 갭을 인위적으로 창출해 이 갭을 줄이는 작업을 학습으로 규정한다. 이원학습의 갭이 실수를 통해서 귀납적으로 찾아진다면 삼원학습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새로운 맨탈모형에 담아 이것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현실과의 갭을 창출하여 이 갭을 메워나가는 연역적 학습법이다.


삼원학습과 맨탈모형


형제 달리기 선수가 있었다. 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로 뛰어난 육상실력을 경주해왔다. 둘은 대회에 나갈 때마다 한번은 형이, 다른 한번은 동생이 우승을 번갈아 가며 하곤 했다. 어느 날 부터는 형이 달리기에 대한 무슨 원리를 터득했는지 동생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형의 기록을 깰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동생이 형에게 찾아가서 형에게 한 수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동생의 간청에 형은 달리기의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형은 동생이 달리기를 발로만 하려고 하고 있다는 지적을 해가면 정말 잘 달리는 사람은 손으로 달리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충고한다. 동생은 형의 이 조언에 전적으로 수긍한다. 동생의 머릿속에 잘 달리기 위해서 한 것이 발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타이어를 묶고 언덕을 오르내리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문제는 손으로 달리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손과 발이 엇박자를 내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가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원리를 깨달은 동생과 형은 다시 주거니 받거니 해가며 전국체전을 휩쓴다. 한번은 동생이 우승하고 다름 번에는 형이 우승하고. 집에 우승 트로피가 가득 찰 무렵 또 동생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또 다시 형의 기록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생은 다시 형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 다시 한 수를 가르쳐 달라고. 동생의 간청에 오랫동안 미소만 짓던 형이 한 마디 던진다. 너는 달리기를 손으로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진짜 잘 달리는 사람은 마음으로 달리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마음으로 달리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선 우선 한국에서 최고라는 자만심의 감옥에서 자신을 구해 적어도 아시아에서 최고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심어 놓고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동생과 형이 손으로만 더 잘 달리는 법을 연구하여 더 나은 기교를 발견하였거나 발로만 잘 달리는 법을 연구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면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원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생이 형의 조언에 따라서 손과 발 사이에 엇박자가 리듬을 깨거나 속도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둘 간의 갭을 통합하여 새로운 기록을 낸 것은 이원학습에 해당한다. 동생은 이원학습을 통해서 좀 더 근원적인 달리기에 대한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맨탈모형 I을 좀 더 완벽하게 만들게 된다. 이 형제는 어느 순간 손과 발을 맞추는 것만으로 근원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기록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고 생각을 바꾸어 큰물에 나가서 달리기를 해볼 생각을 하게 된다. 즉 한국에서의 최고를 넘어서 아시아에서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가지게 된다. 이 꿈은 형이 이야기 하는 마음으로 달리는 것의 기반이 되어 맨탈모형 II로 구현된다. 이 꿈에 너무 매료된 형제는 한국에서의 최고와 아시에에서의 최고 사이에 깊은 간극이 있음을 다시 깨달고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한 근원적 노력을 시작한다. 삼원학습의 원리는 새롭게 세상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마음인 맨탈모형 (모형 II)를 구축하여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고 여기서 창출된 갭을 줄이는 방법으로 하는 학습을 일컫는다. 맨탈모형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 철학 등등 다양할 수 있으나 이 중 학습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비전, 미션, 가치이다

비전은 자신의 성장한 미래의 모습에 대한 생생한 그림이다. 조직도, 개인도, 사회도 비전을 가지고 있다. 미션은 조직이나 특정한 개인이 세상에 굳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꼭 존재해야 하는 신성한 이유를 즉 존재의 목적을 말한다. 미션은 북두칠성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북두칠성은 조직이나 개인이 불확실한 환경에서 길을 잃게 될 때 길을 제대로 찾아 가게 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에 반해 비전은 이 미션에 이르는 과정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비전의 다리는 미션을 향해 정렬되어 있다. 가치는 조직이나 개인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을 말한다.  새로운 맨탈모형을 만들어서 현재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맨탈모형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 둘 간의 갭을 메워나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학습이 삼원학습이고 삼원학습은 결국 마음의 변혁을 통한 학습이다. 마음의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맨탈모형을 구성하고 있는 비전, 미션, 가치의 힘 때문이다.


 Bacon이 본 삼원학습

베이컨은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는 중세의 암흑세계로부터 사회를 구해내자는 운동의 일환이다. 세기적 변혁운동인 셈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책 신 기관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학습하는 방식을 개미방식, 거미방식, 꿀벌의 방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개미방식으로 학습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지식을 밖에서 가져와 개미집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 스타일로 학습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문제는 이 지식들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특별한 이론적 체계는 없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워서 학습을 한다면 아마도 개미방식으로 학습하는 것이 될 것이다. 거미방식은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경우이다. 자신이 쳐놓은 거미집에 들어오는 먹이는 확실히 잡아서 소화시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습방법은 거미집 밖을 벗어난 세계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있으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독선으로까지 느끼게 하는 학습방법이 바로 거미방식이다. 거미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독선적 이론체계에 너무 매달려 다양한 현실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거미방식의 학습오류에 빠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꿀벌의 방식은 가장 창의적 학습방법이다. 꿀벌은 꿀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수없이 많은 꽃을 섭렵해가며 밖에서 채집해온다. 이 채집해온 꿀들은 개미방식으로 그냥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레서피를 이용해 독창적인 자신만의 고유한 브랜드 가치가 있는 꿀로 탄생시킨다.

삼원학습의 입장에서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베이컨의 학습방식을 다시 해석해보면 개미방식으로 학습을 하거나 거미방식으로 학습을 하는 것은 모두 일원학습이다. 그림에도 나타나고 있듯이 개미는 부지런해서 실천위주의 지식을 축척해 놓는다. 반면 거미는 독선적이어서 이론적 지식만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의 문제는 실천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의 부재이고 거미의 문제는 이론을 검증해주는 경험적 실천의 부재이다. 현업에서 이것저것의 노하우를 많이 취득한 베테랑들은 실천을 기반으로 한 일원학습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실천들 간의 엮어 줄 수 있는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형성했다면 이들은 이원학습을 한 것이다. 반면 상아탑에 갇혀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면 이들도 역시 거미식의 일원학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사람고치는 기술만을 터득했다면 이들의 학습도 일원학습에 국한된 것이고, 법조문만을 달달 외워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검사나 판사들도 자신들의 프랙티스가 미치는 영향력의 세계에 대한 매력적인 맨탈모형을 구축하지 못했다면 이들도 결국은 일원학습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자신의 미래와는 상관없이 학원에서 시험 잘 보는 기계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면 이것들도 결국은 일원학습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모두에 예로 들었던 대치동의 아주머니도 일원학습을 진정한 학습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일원학습의 함정을 들여다보면 생각 외로 똑똑하다고 알려진 사람들, 전문가라고 불리는 집단의 사람들이 일반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누구보다 일원학습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이를 통해 얻은 성공의 체험이 독약이 되어 일단 함정에 빠지면 더욱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교육문제는 교육의 리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원학습만을 진정한 교육이라고 믿고 이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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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학습의 대가들은 남들이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맨탈모형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 이 정신세계는 거미들이 가지고 있는 독선적 이론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이 세계의 맛을 본 사람들은 이 세계가 주는 신선한 맛에 매료되어 이들과 이야기 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자신의 맨탈모형에서 꿈꾸는 세계가 현실에서 구현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게 되고 구현된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관행으로 벤치마킹되어 전파된다. 좋은 것을 따라하는 학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삼원학습자들이 자신이 고유하게 창출한 맨탈모형 II에 대해서 매료되어 이것이 현실화 될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것은 이전에 세상을 이해하고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설명해주는 암묵적 맨탈모형 I과 창조적 긴장을 창출하게 되고 이 창조적 긴장이 사람들을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매료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자신의 맨탈모형 II에 매료된 사람들은 맨탈모형 I과의 갭을 하루빨리 줄여나가려고 노력할 것이고 이 갭을 줄여나가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둘 간의 갭이 줄어드는 과정이 바로 삼원학습이다. 개인들은 집단으로 모여 살게 되면 자신들의 맨탈모형을 집단의 범주에서 공유하게 되고 이 공유된 맨탈모형은 바로 집단의 맨탈모형, 조직의 맨탈모형, 사회의 맨탈모형이 된다.

삼원학습의 원리에 관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점 중 하나는 이원학습을 건너 뛰어 삼원학습으로 직접 넘어갈 수 있는 지에 관해서이다. 삼원학습을 연구하고 있는 우리 연구진의 입장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성찰훈련이 생활이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훌륭한 조직으로 재탄생하는 경우는 이원학습을 통한 학습이 충분히 축적이 되어 있을 때 삼원학습의 실마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원학습은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왜 잘해야 하는지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과 남들을 설복시킬 이유를 설명해 준다. 따라서 지속적인 이원학습 경험을 통해서 하나하나 터득하는 원리는 인생의 중요한 성찰적 계기를 만들게 된다. 삼원학습의 틀은 과거에 형성된 이와 같은 소중한 성찰과 각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할 때만 그 의미가 살아 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장부터는 각 영영별로 일원학습의 거대한 함정에 빠진 한국사회를 성찰하고 이원학습과 삼원학습의 원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사점들을 제시해 볼 것이다. 2장에서는 삼원학습의 가장 중요한 기제인 맨탈모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이 힘을 삼원학습을 위해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삼원학습의 원리로 학습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창조되고 유지되고 강화되는지를 플로우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이해해 볼 것이다. 4장에서는 리더라는 사람들은 과연 삼원학습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진성리더십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5장에서는 조직에서 이원학습을 통해서 삼원학습의 기반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교육담당자들은 자신의 조직이 이원학습을 넘어서서 삼원학습으로 이행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살펴볼 것이다. 6장에서는 조직의 변화를 삼원학습의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고 7장에서는 학습의 평가라는 측면에서 삼원학습의 원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각 사례들을 이용해서 삼원학습이 어떻게 일원학습의 함정에 빠진 우리 사회를 구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들을 정리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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