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다.
리더로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
리더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메타인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고 이것을 상수로 받아들어 변화를 선도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자체의 삶이 사회적 존재인 것은 한자의 사람 인자에도 담겨 있다. 사람은 혼자서 설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누구에게 기대어서 서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기대어 서 있는 것은 그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풍미를 풍긴다.
리더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더 높은 차원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리더 개인의 능력이 출중해도 이런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좋은 리더가 될 수는 없다. 리더는 이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통해서 무에서 유라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리더가 무에서 유라는 변화를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리더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개념이 이 개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원이나 능력이나 재원을 가진 사람들 마음 속에 성공적으로 끼워져야한다. 리더가 꿈꾸는 세상은 변화의 목적지에 대한 스토리가 이 스토리에 공감하고 이 스토리를 구현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을 때 이들의 협업을 통해서 현실로 태어난다. 목적을 중심으로 관계적 자본을 동원할 능력이 없다면 리더는 아니다. 리더는 사람들이 단순히 기대어 사는 모습을 넘어서 기대어 사는 것으로 더 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큰 목적을 비전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그냥 인간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리더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죽음 앞에 섰을 때 나는 후세들에게 내가 이승에서 운반해왔던 바톤을 넘겨주어야 한다. 죽는 순간 내가 이 세상에서 축적했던 부와 명예와 물질은 다 떨어져 나가고 나에게 남은 것은 후세에게 전해줄 나를 대변할 수 있는 기억의 바톤만 남는다. 문제는 후세에게 이 바톤을 물려줄 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톤이 성공적으로 전수되는지의 문제는 받는 사람의 자발성에 달려 있다. 나는 이미 육신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육신의 힘을 이용해 후세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 후세에게 나의 바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후세가 나의 바톤을 받아서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후세의 자발성에 달려 있다. 내가 후세에게 넘겨주는 바톤이 이런 후세의 자발성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면 후세는 내 바톤을 거절할 것이다. 결국 내가 살아서 미래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은 내가 남겨준 바톤이 후세의 기억 속에서 운반되는 바톤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내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자 모든 것이 소멸된다면 나는 미래를 만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역사성은 소멸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서 이들이 나의 과거를 회상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구성해나갈 때 나의 역사성은 온전하게 완성된다.
리더로서 역사성을 보이는 것은 리더가 만든 문화적 족적이 다음 세대에게 플랫폼 으로 작용할 때이다. 리더가 만든 족적이 다음 세대에게 전수되어 이들이 이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바톤을 만들거나 아니면 넘겨준 문화적 족적이 후세의 플랫폼이 되어 다음 세대들이 자신을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운동장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깨달지 못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그냥 육신으로 왔다가 죽음과 동시에 먼지로 소멸되는 허망한 존재일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역사성 속에서만 구현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밈 Meme 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 역사적 대업에 실패한다면 나는 아니면 영구히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끼어들어 이들이 나 때문에 웃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또한 남을 위해 더 좋은 행동도 할 수 있게 할 수 있는지가 내 존재의 본질적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