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삶의 루틴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을 갖는다. 젊어서는 매일 새로운 루틴을 실험하고 좌충우돌하는 각종 사건을 통해 효율적인 루틴을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안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화살처럼 빨라지면 점점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워지는 불안에 휩싸인다. 이때 등장하는 말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이 먹는 불안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향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탐구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물리적 숫자의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제대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카이로스의 나이는 무엇을 뜻할까?

뇌과학자인 대니얼 레비틴(Daniel Revitin) 교수가 <성공적으로 나이들기 Successful Aging>라는 책에서 카이로스의 나이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몸의 나이는 크로노스 나이인 숫자에 불과할 뿐이고 제대로 나이듬은 뇌에 새겨진 나이테의 경계가 확장되고 있는지 쪼그라들고 있는 지 카이로스 시간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레비틴은 뇌의 나이테가 새로운 의미 있는 경험에 의해서 채워지고 확장된 경계를 마련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의 흐름을 타게 되면 나이를 먹어도 늙은 것이 아니라 더 한창 때를 만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몸의 나이와 함께 뇌의 나이테가 늘어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우상향의 번성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인간의 뇌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대한 지도 그리기를 한다. 지도작업은 신경세포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가지치기 작업을 통해서 행해진다. 지도작업을 통해 자신의 지도 안에 그려 넣어야 할 바깥과 안 공간을 구획하는 경계를 확정하고 이 경계 안에 있는 지형의 모습을 그려낸다. 나이테는 바로 자신이 확정한 경계이고 경계가 확장되면 나이테가 성공적으로 늘어난다. 시냅스를 통한 지도 작업은 20대 중 후반까지는 주로 가지치기를 통해서 길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한 학습이 끝나 지도가 완성되는 시점이 되면 세상이 바뀌어도 시냅스의 새로운 연결을 통해 세상에 맞는 지도를 새롭게 그려낸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 된다.

결국 뇌 안에 새로운 나이테가 있는 지도를 만들어 경계를 확장하는 것은 뇌가 완전히 성숙하는 20대 후반부터다. 20대 후반에도 경계의 확장을 보여주는 뇌의 나이테가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은 제대로 나이 들고 있음의 증거다. 시냅스 지도가 일차적으로 완성되는 30대를 지나 40대 50대 60대가 되어도 시냅스 지도를 세상의 바뀌는 형국에 따라 다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극도로 힘든 일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습 방식으로는 지도를 바꿀 수는 없다. 뇌가소성(Neuro placiticity) 가설은 힘들지만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지독하게 노력하는 사건을 일으키면 뇌의 나이테를 확장할 수 있고 나이테 안의 지도도 새롭게 바꿀 수 있다는 가설이다. 뇌가소성 가설은 일단 만들어진 시냅스 지도를 나이가 들어서 바꾸는 것은 죽기보다 힘들다는 역설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

충분히 구조 생리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었을 때 뇌의 나이테를 만드는 일은 전전두엽에 맡겨진다. 전전두엽은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사명과 가치의 울타리다. 목적이 실현되어 사명의 울타리가 점점 확장되는 경험이 가상디지털 공간인 전전두엽에 흔적을 남긴 것이 뇌의 나이테이다.

과거에 그린 뇌의 나이테 경계가 더는 확장되지 않는 사람들은 같은 경계에 매년 경계를 더 진하게 그려 넣는 형국이어서 만들어진 경계의 담장만 높이는 효과를 초래한다.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는 담장이 높아지기 시작하면 세상으로부터 에너지가 유입되는 것이 차단되고 에너지가 필요해 세상에 소리쳐도 자신의 요청이 자신이 세워 놓은 벽에 부딪쳐 울림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자신이 지금까지 벌어 놓은 에너지를 야금야금 먹어가며 생명을 유지하지만 결국 종착역은 생명의 소실인 죽음이다. 확장되지 못한 경계가 자신을 가두고 소실시키는 감옥으로 전락한 것이다.

잘 늙었음을 설명하는 카이로스 나이테는 세상에 울림을 주는 품성이 습관으로 내면화되어 공진화하는 과정이다. 나는 평소 목적의 울림이 있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징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해왔다. 징은 모든 것이 연결된 에코 시스템에서 먼 울림을 만들어내고 울림에 대한 피드백으로 성공을 만들어내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림에도 보이듯 징소리가 멀리 에코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징 속의 나이테 무늬가 공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뇌의 카이로스 나이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목숨처럼 중시하는 것이 목적에 대한 신념이라고 본다. 존재목적은 나이테라는 징을 이용해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화음으로 들려준다. 리비틴 교수는 존재목적을 가진 사람이 물리적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약속을 실현해 약속을 지킨 사람으로 흔적을 남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삶의 긴박감을 창출한다고 설명한다. 이 긴박감이 뇌과학적으로 각종 긍정적 호르몬(도파민, 엔돌핀, 세로토닌, 옥시토닌)을 방출해 삶에 더욱 집중하게(engaged) 만들고 윤택(enriched)하게 만들어 뇌 전전두엽 경계인 뇌의 나이테를 지속적으로 확장한다. 이런 목적 스토리가 나이테의 울림을 타고 세상에 전달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을 하든 좋은 피드백으로 삶의 번성을 구가한다. 이런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우상향의 번성을 향유하고 세상에 자신만의 유산으로 족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정리하면 성인 머리에 새겨진 뇌의 카이로스 나이테는 뇌의 전전두엽이 경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뇌에 카이로스 나이테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유한 존재목적의 나침반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목적의 내러티브를 나이테의 징에 담아 세상에 전달한다, 메시지는 존재목적의 징소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운용하는 존재목적이 만들어낸 징소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흔들어 깨우고 일으켜 세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새로운 카이로스 나이테를 그려내게 만드는 힘이 된다. 오늘도 전전두엽이 그려내는 뇌의 나이테를 늘리는 흥미진진한 사건을 일으키는 삶에 매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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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박노해 <삶의 나이>라는 시에도 어느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의 카이로스 나이테를 어떻게 세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묘비에는 3·5·8…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 삶의 나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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