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26 07:55
[N.Learning] 한강이 다시 세운 국격 노벨문학상 쾌거
 글쓴이 : Administra…
조회 : 1,258  
한강이 다시 세운 국격
노벨문학상 쾌거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선조들이 피땀흘려 세운 나라의 국격을 깎아내리고 심지어 주권까지 양도해가며 끝없이 추락하던 대한민국에게 날아온 낭보다. 날개 없이 추락하던 국격에 인공호흡기가 붙어 심폐소생술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강이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큰 강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인의 정신에 대한민국의 글쟁이가 큰 강을 만들었다.
한강의 노벨상은 대한민국이 김구선생의 소원대로 문화강국으로 다시 세워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을 일제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대한국민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엄성을 찾아주자는 진북(True North)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선생이 평소 생각하시던 독립국가의 모습은 경제적 대국을 넘어선 문화강국이다.
문화강국이 되기 위한 대한국민이 길러야 할 역량이 한 가지 있다면 문해력이다. 문해력이란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텍스트를 날줄로 삼고 여기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일인칭 스토리를 직조해서 자신만의 일인칭 태피스트리의 지평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문해력은 세상의 지식을 업데이트 한 것에 자신의 삶을 끼워넣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과는 다르다. 최고의 지식이라고 해도 지금 주어진 상황을 업데이트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폐기처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해력을 살려 한강의 소설과 글을 세계인들의 맥락에 맞게 번역한 데브라 스미스의 노고도 드높히 사고 싶다. 본인도 영어로 쓴 본인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다 실패했고 본인의 한국어 저술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번역은 두 문화의 맥락을 모두 꽤뚫어가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작가들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데브라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번역가로 진로를 정하면서 번역 업계에서 '틈새시장'이었던 한국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런던대 동양 아프리카대(SOAS)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기 위해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구선생이 말씀하시는 세계를 관통하는 스토리텔링은 이런 협업을 통해 만들어낸 문해력의 결과이다. 문해력이 없다면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날줄로 삼고 미래도 현재로 가져와 씨줄로 삼아 새로운 미래의 운동장을 만들어갈 수 있는 비전을 상실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이끌 차세대 리더는 이런 문해력을 토대로 대한민국에 고유한 문화공작소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음 대선에서는 영업사원이 아니라 초연결 디지털 시대 대한민국 문화공작소를 설계해 낼 수 있는 문해력이 있는 리더의 등장을 기대한다.
==========
문화강국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준다."
인류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 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구성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저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타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

한강이 살려낸 대한민국 희망의 불씨
희망의 뿌리를 찾아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을 묘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도입하는 사자성어는 각자도생이다. 공동 운명체로 알고 타고 있던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리더들의 실책으로 난파선으로 전락하는 사건 사고가 넘치자 장본인인 리더라는 먼저 희망을 버리고 각자도생을 실현하기 위해 조타를 포기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이런 현상에 반응해 구성원들도 배가 침몰할 것에 대비해 각자의 구명조끼를 점검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호는 희망을 잃고 표류하는 배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각자도생을 위해 남들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 일이다. 모두가 자신의 살 길을 찾아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미래에 투자해서 가져올 이익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미래의 희망을 잃은 조직, 사회, 개인은 모두 계산기를 두드린다. 희망을 잃는 것도 상대적이다. 가장 가진 것이 없는 MZ세대가 계산기 두드리는 일에 가장 앞장선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공정이지만 공정은 희망을 잃었음에 대한 명분이자 분 풀이다.
대한민국에서 꺼져 가는 희망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다.
Passion이라는 용어의 원래 뜻은 고통이 주체적으로 해결되었을 때 주체가 느끼는 희열이란 뜻이다. Passion에는 고통이라는 의미가 더 근원적 어원으로 들어가 있지만 결과 중심적인 사람들이 고통을 빼고 희열만 강조하는 껍데기만 남은 어휘로 변질시켰다. 단기 성과 중심주의에 경도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과가 나지 않을 경우 구성원에게 열정(Passion)이 없다고 비난한다. 이들이 말하는 열정은 열매를 가져오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하는 꼴이다. Passion이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한 주체적 해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열정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외면하고 결과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현상이다. 열정이 발생하는 원천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생긴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이 생기면 고식적 처방으로 진통제를 주거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지만 이런 해법은 고통 속에 구더기가 생기게 만들고 고통을 키울 뿐이다. 누군가가 고통 위에 문제해결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놓은 거적을 들춰내고 자신의 고통 속에 생긴 구더기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보일 때 고통이라는 암흑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본다. 희망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만이 불꽃으로 살려낸다. 고통을 자신이 직접 직면하고 치유해보겠다는 용기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세운 목적을 앞 세워 고통의 원인을 찾아 불을 붙였을 때 고통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자그만 희망의 불씨로 자란다.
고통의 근원적 원인이 목적과 만나 작은 희망의 불씨로 자라고 고통을 부인하는 산성화된 세상이 주는 저항을 일관되게 극복하여 고통을 원인의 수준에서 치유하는 알고리즘을 만들 때 희망의 불씨는 더욱 커진다. 고통이 해결되어 결실을 맺어 희열을 만들어낼 때 희망은 내재적 발전소가 되어 세상에 불을 밝힌다.
Passion이 개인의 희망을 등대를 세우는 비밀을 담고 있다면 Compassion은 공동의 고통을 직면해 공동의 희망등대를 만드는 비밀이다. 공동의 고통을 용기 있게 직면하고 공동의 해결책인 알고리즘이 만들어져 참여자 모두가 공유하는 희열을 만들어는 기재는 한 개인의 Passion을 넘어선 Com+Passion, 즉 긍휼의 힘이다. 긍휼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대한민국 신바람의 원천이었다.
대한민국이 희망을 잃은 이유는 Passion의 원천에 해당하는 개인의 고통에 대한 외면도 기여했지만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공동의 고통에 대한 용기 있는 직면인 긍휼(Compassion)의 부재 때문에 생겼다. 사회의 리더로 추대된 사람들이 먼저 자신과 가족을 제외한 일반적 타자들에 대한 긍휼을 잃어버린 것이 시발점이다.
경기가 무한 성장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믿음이 있었을 때 결과 중심주의 심리학을 주도했던 긍정 심리학이나 강점 경영도 이런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면보다는 즉각적 처방인 반창고나 진통제를 마치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남용해 역설적으로 희망의 불씨를 꺼트린 장본인이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도 대한민국이 이런 고통에 대한 뿌리 없는 거짓 희망 때문에 희망을 잃은 국가라는 세계인의 경종이다.
<채식주의자>는 희망을 잃고 획일화된 대한민국이라는 물질주의와 단기성과주의 사회의 가치관의 폭력성에 상처 당했지만 외면 당한 주인공을 묘사하고 있다. 채식이란 이런 동물적 폭력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다. 문제는 이런 선택으로 인해 아버지가 채식주의자 딸에 가하는 또 다른 폭력성에 노출된다. 채식주의자는 아버지 폭력의 빌미가 되기 때문에 다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무가 되는 꿈을 꾼다. 아버지 폭력에 대한 상처와 언니가 정신병원에 갇힌 채식주의자 동생의 상처를 용기 있게 대면하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불씨가 생긴 희망을 노래한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에서 국가의 폭력이 만들어낸 트라우마와 상실감에 대한 거적을 들춰서 국가적 상처를 넘어 여전히 치유 받지 못한 지역과 개인과 가족의 상처를 용기 있게 직면하는 이야기다. 친구를 찾아서 전남 도청이 들어간 중학생 동호라는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다수의 소년인 동호가 도청 안에서 만난 산자와 죽은자들을 넘나드는 시적 산문이다. 다수의 소년은 이런 폭력성의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치유를 상징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역사적 치유를 넘어 개인에게 4.3이 남긴 치유되지 못한 가족을 잃은 슬픔, 죄책감, 상실감 등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에 관한 희망의 이야기다.
한강의 모든 소설은 상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덮어놓은 거적을 들춰내고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만이 진정한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깨우쳐준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린 이유는 타인과 사회의 아픔에 대해 외면하고 거적을 덮어놓는 행위가 삶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은 상대의 아품을 내 아픔으로 가져와 직면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긍휼의 회복을 통해서다.
희망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희망의 불씨를 어디에서 다시 살려야 하는 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우리에게 노벨상 위원회는 답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는 우리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성과주의에 취해 답으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우리 머리를 망치로 산산조각 낸 셈이다. 남들이 아니라 바로 한강이 오래전부터 외쳤지만 외면했던 우리의 이야기 속에 희망에 대한 답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한국인들이 귀 기울지 않는 우리 자신의 아픈 스토리를 영어로 번역해 아픔을 가진 세상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켜 아픔에 직면하는 용기의 중요성을 일깨워 노벨 문학상에까지 이르게 한 데브라 스미스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