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은 증명하는 방법은 중력의 무게를 거부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어 있는 것은 스스로 중력을 넘어설 힘이 없으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인간이 생명이 붙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면 식물인간이다. 외적 힘의 도움이 없다면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다. 중력은 죽음의 악령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들은 거동에 제약이 없는 분들이 최고로 부럽다. 이들은 거동이 가능한 분에 비해 중력의 제약을 넘어서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음성 꽃동네가 만들어지는 씨앗을 뿌렸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빌어 먹을 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다"라는 말씀으로 살아 있음의 은총을 실천했다. 본인도 어려운 처지이지만 빌어먹는 움직임조차도 못하는 병든 걸인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다 세상을 떠났다.
니체는 춤출줄 아는 신만을 신으로 모시라고 주장한다. 춤은 죽음의 대변인인 중력의 무게를 거부할 뿐 아니라 삶의 플롯에 따라 정교하게 살아 있음을 예술적으로 증명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목적에 맞닿은 삶이 있는 사람들만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니체는 사람들이 성숙해지는 단계를 남들의 명령에 따라 사는 낙타의 단계, 남을 호령하며 사는 사자의 단계, 놀이자체가 목적인 천진난만한 아이의 단계로 나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가장 높은 단계로 삼는 것은 아이들은 삶을 놀이로 여기며 항상 뛰어다니고 춤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중력을 가장 자유롭게 넘어선 주체이다. 낙타는 자신도 중력의 무게를 넘어서기 힘듬에도 남들의 짐까지 지고 중력의 무게를 넘어서기 위해서 움직여야하는 고단한 삶을 산다. 사자는 자신이 스스로 짐을 지지는 않지만 주변에 낙타에게 짐을 지운다. 이들에게 짐을 지게함으로 중력의 편에 선다. 사자는 중력의 편에선 악마다. 아이들은 이런 짐에서 벗어나 몸이 가벼워 항상 자신들이 기획한 놀이의 플롯에 따라 춤을 추며 살아간다. 아이들만큼 몸이 가벼워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없다.
한 마디로 중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아이처럼 자신 삶의 목적이 함축하는 안무에 따라 덩실덩실 가볍게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진성리더십 도반이자 (사)미래준비 이사장으로 계신 안남섭 (Nam Sup Ahn)코치께서 우리 도반들에게 가르쳐준 지혜도 바로 니체와 맥이 닿아있다. 안코치께서는 인생은 할까 말까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라고 정의하신다. 또한 할까 말까를 선택할 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냥 하는 쪽을 선택하라고 충고해주신다. 해보고 좋으면 계속하라고 조언하신다. 하지말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중력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죽은듯이 움직이지 말고 가만이 있으라는 중력의 명령에 굴복하는 것이다. 중력과의 싸움에서 패배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할까는 삶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중력을 넘어서 춤추는 행위에 맞닿아 있다.
남양주의 매그너스 요양병원 내과의사인 한원주 과장은 올해로 94세이다. 이분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옛날에는 '무조건 쉬라'고 했는데 누워만 있는 환자가 빨리 숨지더라. 살아 있는 동안엔 움직이면서 자기 할 일 하면서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치매는 중력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라고도 설명한다. "암보다 무서운 것이 치매인데,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있으면 치매가 빨리 온다".
세월호 때 이준석 선장은 춤출 수 있는 아이들에게 <가만이 있으라>고 중력을 대신한 명령을 내려 아이들을 수장시켰다.
할까 말까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중력의 유혹을 거부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목적의 안무에 따라 자유롭게 춤추게 할 수 있는 근력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어로 <나는 최고의 행복을 체험하고 있다>를 <I am on cloud 9>이라고 한다. Cloud 9(적란운)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구름으로 중력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구름이다. 이 적란운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바로 내 삶의 목적의 노래에 맞춰 춤출 때일 것이다.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내 삶의 목적을 은유하는 Cloud 9에서 덩실덩실 춤출 수 있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