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춤출줄 아는 신만을 신으로 모시라고 주장한다. 춤은 죽음의 대변인인 중력의 무게를 거부할 뿐 아니라 삶의 플롯에 따라 정교하게 살아 있음을 예술적으로 증명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목적에 맞닿은 삶이 있는 사람들만 불필요한 짐들을 벗어버리고 본질에 집중해가며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춤추지 못하는 자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기적 사건이 골리앗과 다윗간 전투였다.
골리앗은 엄청난 거인이었지만 흔히 두개골이 큰 거인들이 많이 앓고 있는 지독한 근시안 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어서 민첩하게 움직이기도 힘들었겠지만 다윗과의 싸움에서 진 치명적인 이유는 지독한 근시안 때문이었다. 골리앗의 눈에는 다윗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안보이는데다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해서 움직일 수 없는 골리앗이 다윗을 향해 외친 말이 [가까이 와서 한 판 붙어보자] 였다. 골리앗의 상태는 춤출 수 없는 중력의 노예였다.
골리앗의 이런 문제를 알고 있는 다윗이 골리앗의 주문대로 가까이 갔을 이유가 없다. 결국 왕이 입혀주는 갑옷도 벗어버리고 멀리서 다섯개의 풀무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트린다. 다윗이 골리앗과 같이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당시 싸움의 표준이기도한 골리앗의 요청대로 가까이에서 싸웠더라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춤추는 다윗이 중력의 노예가 된 골리앗을 무너트린 서사가 완성된다.
춤출 수 있는 사람들만 중력의 무게를 거부하고 자신의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전개시킨다. 호기심은 자신이 중력을 벗어나 춤추며 살 수 있다는 증표다. 나이가 들고 사는 것이 중력에 찌들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호기심이다. 편견의 중력에 갇혀서 살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호기심이다. 성공의 무게에 짖눌려 살 때도 잃어버리는 것이 호기심이다. 과도한 죄의식도 중력에 무게를 더한다. 호기심은 중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천사다. 중력에 굴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호기심이다.
구글, 아마존, 넷플릭스, 애플 등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도 호기심이다. 중력에 찌든 삶을 살고 있는지 춤출 수 있는 애자일한 사람인지를 가장 잘 측정해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취업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어린이들만 가진 호기심을 지켰다는 것은 자신의 춤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다. 모든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이 왔다가 사라지는 편유인 이유는 어른들이 자신의 춤에 대한 안무를 만들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안무를 잃어버린 이유는 중력에 찌뜬 학교로부터 춤추는 삶에 대해 호된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죽이고 중력의 삶을 택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춤과 호기심의 원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답으로 다윗의 춤추는 방식보다는 골리앗의 중력의 무게에 굴복하는 방식을 따른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성공의 개연성을 더 죽이는 삶을 택한다. 변화가 상수가 된 시대 골리앗 방식으로 싸움에 임한다는 것은 그냥 자살행위다. 그냥 죽음에 뛰어드는 것이다. 치장과 연기를 위해 가지고 다니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삶의 존재이유인 목적에 충실하게 춤추고 안무하는 자만이 생존한다. 시대에 맞는 가장 애자일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초연결 디지털 시대는 자신의 삶의 목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춤출 수 있는 자만이 생존한다. 중력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삶의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잃는다.
나는 춤출 수 있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