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문화일보 2013년 11월 1일
지난달 우리는 한국의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문제점에 대해 살펴봤다. 대부분의 순서가 천편일률적이었고 의미가 바란 경우가 많았다. 지금 우리나라 장례식은 ‘주자가례’를 대폭 간소화해서 따르고 있다. 이처럼 주자가례를 아직도 따르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민속학을 전공한 지인이 대만에 가서 우리나라 장례 절차를 알려주었더니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신기해 하더란다.
그런데 현대 한국인들은 장례 절차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상조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성복(成服)이 무엇인지, 삼우제(三虞祭)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냥 따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는 사람들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장례식만큼은 당사자들이 미리 디자인하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권하곤 했다.
자신의 장례식을 디자인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지금의 천편일률적인 순서를 지양하고 자신이 직접 순서를 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자는 것과 같은 말이다. 죽음을 끝까지 피하다 자신은 속절없이 떠나버리고 그 뒤의 장례는 자식들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장례식을
자기가 디자인해 보자는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나는 이런 예를 우리나라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 서구에서는 가끔씩 이런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어떤 간호사의 경우인데 그가 어떻게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했는지 그 대강만 보자. 우선 초청하는 손님의 명단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그 손님들의 연락 방법을 모를 수 있으니 연락처까지 적어놓았다. 조금 더 욕심 내서 그 중 몇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간단하게 적어 자식들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특히 신세진 사람에게는 특별히 그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 다음 작업으로 장례식의 순서를 자신이 직접 짰다. 예를 들어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니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찬송가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이와 더불어 누가 조사(弔辭)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미리 정해 놓았다. 이런 경우에는 평소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부탁하는데, 이 간호사는 손녀에게 부탁했다.
정말로 용의주도한 사람이라면
감사의
말씀을 자신이 직접 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타계한 고인이 어떻게 자신의 장례식에서 답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방법은 있다. 미리 녹음을 해 두든지 녹화를 해 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임종이 다가오기 전에 정신이 성성할 때 녹음이나 녹화를 하면 좋겠지만, 물론 이런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죽기 몇 달 전부터 의식불명이 된 사람은 이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고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신세졌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씀을 남긴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 역시 슬픈 마음보다는 고인을 기리고 추모하고 싶은 좋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장례식이 무사히 끝나고 문상객들이 장지(혹은 화장장)로 가는 버스에 탔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이니 아무래도 버스 안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버스 안에 설치돼 있는 TV가 켜지고 그 화면에 고인이 나왔다. 고인이 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고인은 그렇게 어리둥절해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인사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날씨도 궂은데 자신이 마지막 가는 길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자신을 생각해준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을 전했다. 그러자 버스 안의 분위기는 아주 가벼워졌다. 그 덕택에 문상객들은 기쁜 마음을 갖고 그날의 순서를 다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TV에 나온 당사자는 그날의 날씨를 어떻게 알고 언급했을까? 그것은 다양한 날씨에 대비해 몇 개의 버전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이렇게만 준비한다면 임종이나 장례식이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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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급적이면 ‘죽는다’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이 단어가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육체로서는 종말이지만 또 다른 몸, 즉 영체(靈體)로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 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것은 필자가 많은 문헌을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죽는다’는 말보다 ‘몸을 벗었다’는 말을 선호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벗을 뿐 자기의식은 계속된다. 많은 사람은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생명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 의식은 그냥 없어질 정도로 약한 것이 아니다. 죽음 뒤의 사정에 대해서 이런 공적인 지면에서 밝히는 일은 다소 무리가 되니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필자가 쓴 다른 책을 참고하면 좋겠다. 나는 항상 그렇게 말한다. 사후 세계는 지금 이 물질세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장대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