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화가 상수인 세상으로 급격하게 진화하고 있다. 우리가 직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직무기술서는 기본적인 전제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변화는 예외적인 변수라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직무기술서는 회사의 고정된 기능과 이를 위해 정해진 직책을 중심으로 역할을 시스템적으로 관리하기 위함이다.

사실 제조업을 제외하고는 직무기술서를 쓰는 회사도 거의 없다. 아마 회사 시스템 상에는 존재해도 이것을 기반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사실 직원들도 자신에게 직무기술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직원도 많을 것이다. 상황이 변화하면 변화한 상황에 맞춰 업데이트 되어야 하는데 실제 변화가 상수가 되니 어느 순간 회사에서도 업데이트를 포기했고 결국 유명무실화된 것이다.

글로벌 초우량 기업들에서 관료제의 주범으로 몰려 오래 전에 폐기처분된 직무기술서를 대체하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책무기술서(Accountability & Role Statement)이다.

책무성이란 조직이 자신들이 사명과 목적으로 정해놓은 것들과 관련된 일에서 제대로 일을 해 성과를 내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지의 문제이다. 책무성은 직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맡겨진 역할(Role)의 결과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지는 문제와는 달리 자신이 이 일에 책임감을 받아 들이는지에 대한 심리적 소유의식의 문제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보다는 회사가 시키는대로 의사결정을 했다면 책무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책임의 문제다. 책임이 있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고 다 책무성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에 정해진 사명과 미션에 대한 심리적 소유의식이 없다면 결국 회사에서 시킨 역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있어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없어서 책무성은 없다. 조직에 사명과 미션이 없어서 스스로 책무를 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에 문제가 생겼다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대표이다. 대표가 져야할 책임을 임파워먼트라는 미명하에 직원들에게도 떠 맡겨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꼬리 자르는 문제는 관료제의 고질적 병폐이다. 관료제의 모랄 해저드는 책무성이 없는 일에 책임까지 덤탱이를 씌우기 때문에 생긴다.

재무적 성과를 많이 낸다고 해서 책무성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회계년도에 운이 좋거나 경기가 좋아서 이런 재무적 성과로 자신의 책무를 다했음을 주장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숫자만으로 책무성을 설명하는 회사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무성을 증거하지는 못한다. 단기적 숫자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가 별똥별처럼 사라져 세상을 놀라게 한 회사는 부지기수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무적 숫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사 책무성의 마지막 지점은 회사가 자신이 세상에 약속한 업에 대한 시간의 검증을 통과해 지속가능한 100년 기업이 되는 것이다.

책무성을 제대로 달성하는 회사는 고객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자신의 최고의 역량을 동원해서 가격을 넘어 서비스의 수준에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회사들이다. 가격으로 승부하는 회사들은 고객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해 반창고를 제공해주거나 아니면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수준에서 생존하는 회사들이다. 이런 회사들이 요구하는 것이 가격이라면 이 가격을 넘어 고객들이 가진 실제의 고통을 원인의 수준에서 사명을 가지고 해결해줄 수 있는 회사들이 소위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이고 이 회사들이 제공하는 (가치-가격) = 서비스가 이 회사들의 존재이유이다. 존재이유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재무적 성과가 이들의 책무성을 증명해준다. 회사가 진정 고객의 고통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헌신한다는 개념이 비즈니스 과정에 면면히 녹아 있지 못하다면 회사의 비전이나 사명은 다 거짓 꾸밈에 불과하다.

가격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회사에서는 회사의 여러 공정이 거쳐질 때마다 부가가치란 이름으로 가격을 부풀려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는 행동을 한다. 이런 부가가치가 높아질수록 가격은 높아지겠지만 고객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이런 회사가 장기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은 없다. 회계사들이 나서서 미시적으로 부풀려 놓은 부가가치가 책무성의 최대 적이다. 진짜 부가가치는 고객의 고통을 가격을 넘어서 해결해주는 가치서비스를 통해서만 창출된다.

제대로 된 책무성을 보이는 회사는 고객의 편리를 넘어서 이들이 가진 고통을 원인의 수준에서 긍휼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회사들이다. 이들이 고객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봉사자로서의 서비스는 이들이 목적과 사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명과 목적이 없는 회사가 재무적 성과에 대해 책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겠다는 것과 같다. 이들도 낙타의 몸으로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책무성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 포장한다.

이 포장지가 뜯기는 순간 이들의 책무성은 가짜였다는 것이 판명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

직무기술서와 책무기술서 간 결정적 차이는 누가 작성의 주체가 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직무기술서는 누가 역할과 책임을 담당하던지와 상관없이 회사의 기능에 따라 탑다운 방식으로 회사가 작성한다. 책무기술서의 작성자는 이 책무를 정의한 구성원이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책무기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하고 다른 구성원들과 협의를 통해 바텀 업 방식으로 수정되고 완성된다. 책무기슬서의 작가는 구성원이다.

구성원 각자의 책무기술서를 제대로 작성하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플레이어들의 상호간 역할이 반영되어야한다.

첫째는 End User로 설정된 고객으로부터의 기대이다. 기업은 고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면화해서 이것을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해결해줌에 의해서 가치를 창출하고 혁신해낸다. 내가 만든 책무기술서가 나에게 맡겨진 고객의 고통을 해결주는 역할과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지가 첫번째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둘째는 회사가 지속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 회사가 달성해야 하는 재무적 성과를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달성해야 하는 이유를 사명으로 실현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결국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대표이사일 것이다. 대표이사가 내가 하는 책무에 대해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반영해서 고객의 기대를 반영한 책무기술서가 다시 수정된다. 내가 대표이사라고 생각할 때 내가 정한 책무에 따라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면 이분이 나를 계속 고용할 것인지를 상상적으로 시뮬레이션해가면서 책무기술서를 수정한다.

마지막이 동료들의 기대의 관점이다. 회사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실행된다. 이 협업을 구성하고 있는 동료의 관점에서 내가 쓴 책무기술서의 역할과 책임을 수정해가는 작업이 마지막 작업이다. 내 책무에서 요구되는 역할에 반대할 것같은 동료와 찬성할 것같은 동료를 염두에 두고 이들 모두를 협업의 파트너로 포함시킬 것인지의 관점에서 책무기술서를 작성한다. 또한 내 책무기술서를 심각하게 같이 협의를 해야할 동료와 단지 내 책무기술서의 내용을 고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동료를 구별해가며 수정한다.

이렇게 작성된 책무기술서도 단지 초안일 뿐이다. 이 초안을 기초로 실제로 일을 해가면서 더 완성된 책무기술서로 진화시켜간다. 그리고 매달마다 이 책무기술서를 수정할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 수정해간다면 무슨 이유에서 수정이 필요한지를 책무를 담당한 사람이 일인칭이 되어 스스로 역할과 책임의 스크립트를 조정하도록 한다.

책무기술서는 자신이 일이라는 토양에 심어진 자신 존재이유를 구현해주는 씨앗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일과 과업의 토양에 이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신이 길러낸 과일나무를 통해 과일이 산출될 때 이 과일에 대해 스스로 책무를 지는 것이 책무성의 핵심이다.

책무과 책임이 수렴할 수 있는 것은 책무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책무성의 결과에 대해 책임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손수 길러낸 과일에 대해 책무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과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정한다. 이처럼 책무가 책임으로 자연스럽게 수렴할 때만 자신 일에 대한 완전한 소유의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