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가족과 같이 하얼빈을 관람했다. 하얼빈은 안중근 열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는 7일간의 일정을 그린 영화다. 안중근 열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그간 많이 출품 되었다. 대부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22년에 뮤지컬로 연출된 영웅도 그리 화제를 끌지 못했다.

역사의 인물을 그린 영화는 이미 역사적 사실이 스포일러로 작용하기 때문에 시대적 맥락에 맞는 주인공 삶의 울림과 이런 울림이 전개되는 흥미의 소재가 가미되지 못하면 흥행이 힘들다. <하얼빈>도 특별히 기대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 몰입도와 영화가 주는 시대적 울림이 가히 상상을 뛰어 넘었다.

이야기는 거사 1년 전인 1908년 신야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시작된다.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으나 사해평화주의자였던 안중근은 포로로 살아 남은 일본군을 동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포로협약을 인용해 석방한다. 살아 돌아간 일본군 장교가 다시 독립군을 기습 공격하고 기습공격에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 대부분을 잃고 안중근 혼자 두만강을 건넌다.

엄동설한에 생사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널 때 사해평화주의에 대한 섣부른 믿음이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고백한 안중근의 대사다.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자신이 다시 살기 위해 지금 두만강을 건널 이유가 없음에 절망하고 차라리 죽을 작정으로 잠을 청한다. 잠에 취해 꿈 속에서 동료들을 따라 두만강이라는 죽음의 강을 건너는 중 깊은 깨달음에 도달해 잠에서 깨어난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죽은 동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해 살려낸 목숨 값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료들이 목숨을 희생해 자신을 살려낸 이유가 있었음을 각성한다. 안중근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가 동료들이 죽음을 통해서도 완성할 수 없었던 "완전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뤄달라"는 약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유지가 동료들이 목숨을 희생해 자신을 살려낸 이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안중근에게 동료들의 죽음은 자신이 살아 생전 독립을 달성하지 못해도 자신도 죽음의 희생을 치루고라도 후세에게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실현하라는 유지를 남기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인 존재목적에 대한 각성은 안중근을 다시 일어서서 다시 길을 걷게 만든다. 존재목적이라는 나침반을 찾아내자 목숨을 무릅쓰고도 가야 할 길이 다시 명료하게 드러났다. 죽어서라도 후세에게 온전하게 독립된 대한민국을 남겨줄 수 있다는 믿음은 최근에 저술한 <급진적 거북이(잉걸북스, 2024)>에서도 조명되고 있다. 급진적 거북이는 독립에 대한 믿음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굳건한 믿음을 보이는 반면 이를 실현하는 일에서는 지금 할 수 있는 것, 당장 할 수 있는 것, 가진 것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의 울타리를 다시 가늠해 여기서 성공의 지렛대를 만들어 현명하게 실현 가능한 거사를 치루는 방식이다. 급진적 거북이 안중근은 책에서 소개한 조용한 반역, 지렛대 전략, 선승구전 전략, 뒤집기 전략, 스파링 파트너 전략, 비밀결사대 전략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밀정 등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만 목적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품은 안중근은 여러 난관을 현명하게 해결해가며 거사에 성공한다.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급진거북이의 전략을 수행하는 7일간은 마치 몇년의 기간을 지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지만 존재 목적을 실행하는 미션과제를 치밀하고 차분하게 거북이 자세로 사부작 사부작 진행한다. 급진적 토끼처럼 날뛰지 않고 극단적으로 현명하고 차분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그린다. 카메라 기법도 롱테이크(시간보다 길게 찍는 기법) 기법이고 해상도가 뛰어나고 넓은 화각을 통해 만주와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이 맥락적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본인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일본에 노예로 살던 시대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제 때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의 자손들이 뉴라이트로 부활하고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대한민국은 몸은 독립국가의 면모를 누리고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온전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한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켜 나라가 길을 잃은 상태임에도 국힘당이나 국무총리 등 내란의 동조세력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길을 잃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영화에도 독립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화적떼로 전락한 무리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내란 동조세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몸이나마 독립국가의 면모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몸은 빼앗겼었지만 마음과 정신은 한번도 일제의 노예상태로 살지 않았던 안중근과 같은 독립투사들의 목숨값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이 목숨을 희생해 남겨준 독립국가의 정신과 마음을 일제의 후손들과 뉴라이트에 다시 빼앗긴 살을 살고 있다.

이번 내란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몸, 마음, 정신 모두가 온전한 독립국가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란의 주모자들과 동조세력이 여전히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정신과 마음이 온전한 우리 만큼은 대한민국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만이 올바른 길을 다시 찾아 나서는 대열에 합류하게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많은 분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하얼빈을 관람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안중근 열사가 단지동맹에서 혈서로 태극기에 쓴 온전한 대한독립을 쟁취하는 일에 모두가 급진거북이로 나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