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롤스, 샌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학자들 사이에 수도 없이 논쟁을 해왔지만 실제 따지고 보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이것이 정의라고 규정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인쉬타인도 지적하고 있듯이 모든 문제는 그 문제와 같은 수준에서는 해답을 찾으려면 만족스런 답을 찾을 수 없다. 정의의 문제는 정의를 안에서 내재적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밖에서 통시적으로 보고 이를 통해 제대로 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수 있을 때 핵심이 드러난다.

인간이 정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정의는 인간을 동일한 잣대로 규정할 수 있다는 가정이 먹혀들어야 해결될 수 있는데 인간은 누구 하나 비슷한 사람이 없다. 우리 일류가 지금까지 번성을 구가한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꽃 피웠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르다는 다양성이 인간 번성의 전제조건이라면 동일성을 가정하는 정의는 개선할 수 있지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철저하게 불공정하게 태어났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태어나서 괜찮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면 최소한 다음 세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재능, 재력, 노력이다. 예를 들어 성공하기 위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공부하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머리를 공부할 수 있는 상태로 바꿀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세가지 조건 중 우리가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노력 뿐이다.

기회의 평등은 정의의 잣대가 되지 못한다. 기회의 평등은 재능을 타고 났거나 재능을 타고 나지 않았어도 비싼 교육을 통해 필요한 재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해결해온 사람과 같은 경주 선상에 세워 놓고 불공정 하게 경쟁을 시키는 형국이다. 기회가 평등하니 노력만 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가장 왜곡시키는 사람들의 대표주자이다. 이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면 아이러니 하게도 정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재능을 타고났거나 재력이 있는 부모를 가진 사람들 편만 드는 것이다.

전문적능력을 기반으로 한 실력지상주의 (Meritocracy) 도 마찬가지다. 조국 사태가 보였듯이 실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전문적 재능과 이에 대한 개발이 필요한데 결국 전문가의 문화적 자본과 경제력을 구축한 부모 자녀들에 의해서 빈 자리가 먼저 채워질 수 밖에 없다.

정의의 핵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능이 부여된 것도 아니고 재능을 개발하는데 드는 비용이 균등하게 제공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결국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이 재능을 개발할 경제력을 가졌는지의 문제는 당사자가 아닌 부모와 관련된 문제다. 결국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는지의 문제인데 이 문제는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결정된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지는 신이 나를 대신해서 제비뽑기 한 결과이다. 좋은 머리(혹은 재능)와 경제력을 동시에 가진 특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확률은 먼 조상에서 시작해서 현 부모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자와 난자가 세대를 이어서 나를 만들기 위해 결합되는 것이므로 실제로 복권 당첨되는 것보다 더 확률이 낮다. 이런 두 조건을 다 가진 부모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신이 대신 뽑아 준 엄청난 복권에 당첨된 행운아들이다.

사회적 정의가 무너지는 것은 이런 신이 대신 뽑아 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복권을 자신이 뽑은 것처럼 주장하거나 따라서 자신은 그렇게 태어날 운명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해가며 여기서 얻어지는 모든 복권 당첨금을 자기 개인 것으로 취할 때이다. 이들이 불운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을 외면할 때 정의는 무너진다.

사회적 정의는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불운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불운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운이 운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인정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재화하고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으로 나설 때에만 제대로 실현된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재화 해서 행동으로 풀어가려는 성향이 바로 긍휼(Compassion)이고 이 긍휼이 정의의 기반이다. 이들이 긍휼감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과도하게 쏟아지는 결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대물림하려고 시도할 때 사회적 정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회적 정의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쏟아진 혜택과 결실의 일부를 행운을 걸머지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돌려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쥐를 실천할 때 제대로 된 방향성을 얻는다. 이들이 사회에 환원한 부를 통해 재능은 있지만 이것을 훈련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쓰여져 이들이 다시 사회를 위한 가치를 창출에 나서게 하는 자발적 동기를 회복하게 할 수 있을 때 정의는 실현된다.

지금은 초연결 디지털 시대이다. 초연결 디지털 시대에는 재능의 상당부분은 AI나 로붓의 도움에 의해서 해결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물려 받은 재능도 없고 경제력도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일어서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재능과 재력이 없는 젊은이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와 자발적 동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정의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적 정의는 <모든 혜택을 타고 나 행운을 누리는 대문자 형의 사람들이 소수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자신이 누렸던 가면을 벗고 소수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행동>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도 긍휼감을 정의의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최고의 부자 반열에 들어 있는 워렌 버핏도 정의의 본질은 긍휼감이라고 조언한다. "당신이 세상의 1%의 사람이라면 나머지 99%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If you are in the luckiest 1% of humanity, you owe it to the rest of the humanity to think about the other 99%)." 자신이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것이 버핏이 생각하는 정의이고 이 정의의 기반은 긍휼이라고 보고 있다. 1986년 포춘지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부자라고 "자녀들에게 흥청망청 쓸 수 있는 돈을 주는 것은 자녀에게 반 사회적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런 행운을 걸머지고 태어나서 과도하게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이런 행운이 없이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이 고통을 같이 해결하기 위해 나서주는 긍휼감이 정의의 본질이다. 이런 긍휼감이 있었다면 정의로 밥먹고 사는 법조계에 전관예우가 자리 잡았을 이유가 없다. 이런 긍휼감이 있었다면 같은 일을 하는 동료를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노조가 득세할 리가 없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모든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대갈등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정부가 정의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그냥 정규직을 늘리거나 공무원을 늘리는 엉뚱한 정책에 재원을 낭비했을리가 없다.

구성원들이 손 잡고 서로를 환대해가며 긍휼감을 실현하기 위해 더 높은 곳에 더 평평하고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건설하고 실제로 이 운동장에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산출해 냈을 때만 정의는 사회적 이슈의 자리에서 해체된다. 정의에 대한 논란은 공평함을 넘어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긍휼감을 회복해 사회의 다양성과 번성을 복원했을 때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는 혜택을 타고난 구성원들이 약자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 얼마나 긍휼감을 보이는지의 문제이다. 정의의 본질인 긍휼이 무시된 상태에서 정의는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기회를 공정하게 하고 과정은 투명하고 결과는 정의롭게 하는 제도를 많이 만들어도 정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숨은 두더지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형국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