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03 15:02
[N.Learning] 정의가 사라진 이유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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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에게 정의를 맡겨서는 안되는 이유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사라졌다
누가복음(8장: 19-21)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 밖에 형제와 어머니가 와 있음을 알린다. 제자들이 굳이 혈연적 단서를 강조하는 전갈에 예수는 "나의 (진짜 가족인) 어머니와 형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수정해준다. 예수에게 가족은 혈연이라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가족이 아니다. 예수께는 혈연으로 엮이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한다면 모두 가족이다.
솔로몬은 자기 아들임을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공의의 판결을 내린다. "아이를 잘라서 공정하게 반으로 나눠가져라." 공정성이나 정의의 기반은 법이 아니라 긍휼감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판결이다. 진짜 엄마는 아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이를 가짜 엄마에게 먼저 양보할 것이라 믿었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들여 행동으로 대응하는 긍휼감이 없다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법적 정의도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이다. 정의가 작동하는 것은 법적 장치가 아니라 법적 장치를 적용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혈연적 자식을 넘어 약자도 가족으로 생각하고 이들에 대한 긍휼감을 행사할 것이라는 일반 사람들의 믿음이다.
정의가 작동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법의 공정한 집행을 넘어서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혈연적 가족이 아닌 약자도 가족으로 규정하여 환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솔로몬이 했듯이 이들의 아픔을 긍휼의 시각으로 판결하고 치유할 때 제대로 세워진다.
이런 정의의 조건과는 반대로 혈연적 가족에게는 배타적 긍휼을 가지고 판정하고 남의 자식에게는 엄밀한 객관적 잣대로 판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대한민국이 생생하게 목격하듯이 내노남불이라는 배타적이고 선택적 정의로 정의를 파괴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법꾸라지들이 법을 앞세워 정의를 철저하게 유린하는 현장이 전개될 것이다. 아래 뱀 그림이 묘사하듯이 정의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파괴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법 정의를 내세워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대신 남의 자식들에게는 법해석을 기반으로 더 객관적으로 냉담하게 대할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이중잣대는 자신의 힘과 연줄과 법해석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배타적으로 정의를 베풀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줄과 힘이 법꾸라지들의 정의와 결탁하면 사회를 갈기갈기 쪼개놓는 사회 정의의 파괴범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줄이 권력과 결탁되면 사회는 핵인싸와 나머지로 쪼개진다. 권력은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줄을 재료로 사회 중심부에 핵인싸에 해당되는 상위 1% 가족을 만들어낸다. 정의가 법꾸라지에 의해 법정의로 이름을 바꿔 이 상위 1% 가족에게만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면 법은 이들의 절대적 기회를 정당화 시켜주는 시녀로 전락한다. 이들을 위해 제외된 나머지 99% 가족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의에서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산다. 최고 연줄 상위 1%의 가족이 혈연적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가족에게 배타적으로 긍휼감을 동원하기 시작하면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운 완벽한 사회적 양극화가 이뤄진다.
조국 가족에 대해 대해서 국민들이 분개한 이유가 법과 정의는 같은 편이 아니라는 각성 때문이었다. 법을 앞세운 선택적이고 배타적으로 행해지는 정의가 사회의 기반을 흔든다는 국민적 각성을 일으킨 것이다. 법적 정의가 정의의 기반인 약자에 대한 긍휼를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일어선 것이다. 윤석열 당선자를 만들어낸 이유도 법을 정의로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문회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 혈연적 가족에 대한 선택적이고 배타적 정의는 조국 가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특권층 모두의 고질적 문제다. 이번 청문회도 정권이 바뀌어도 역시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세워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솔로몬의 사례에서 가짜 어머니가 솔로몬의 판결을 듣고 아이에 대한 긍휼감 때문에 진짜 어머니 마음이 되어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정의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법을 앞세워 자기 아이에게만 혈연과 연줄을 동원해 선택적 정의를 작동시키는 사람이 사회의 리더가 된다면 법은 이들의 선택적 정의를 정당화시키는 도구일 뿐이고 사회적 정의는 파산선고를 당한 것이다.
법은 정의를 가르치는 손가락일 뿐이지 정의자체는 아니다. 검사나 회전문 전관들이 법으로 문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은 정의롭다는 주장을 믿는다면 손가락만 보지 손가락이 가르치는 정의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손가락인 법을 정의자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장에 밀려 이들 법 손가락을 정의라고 믿는 순간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감에 기반한 진정한 사회적 정의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1% 핵인싸 중심의 혈연적 선택적 가족에 대한 유전무죄라는 식의 법적 정의가 대한민국의 정의를 붕괴시켰다. 미래에 대해 긍휼감의 마음을 공유한 일반 99%의 상식에 기대 사는 국민들이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이 가르치는 진정한 정의를 찾아 다시 가져오는 시도를 할 때만 우리 사회는 다시 정의를 체험할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검사 판사에게 정의를 맡기는 순간 정의는 물건너 간 것이다. 정의라는 생선이 고양이에게 맡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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