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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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 건립의 종잣돈이 된 1억 불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 즉 우리나라를 36년간 식민지 지배한 일본에게 사죄 금으로 받아온 돈이다. 포항제철 건설의 프로젝트를 맡았던 고 박태준 회장은 이 돈의 신성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돈을 사용해서 만들어 낼 포항제철의 사명을 제철보국으로 정했다. 제철 산업을 꼭 성공시켜 국가의 은혜를 갚겠다는 뜻이었다. 일제에 희생당한 국민의 목숨 값으로 완성해야 하는 사업이니만큼 실패할 경우 모두가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을 각오로 임했다. 소위 우향우 정신이다. 포항제철 건설은 사명을 실현하는 목적 지향적 프로젝트였다.
돈을 마련했어도 기술이 문제였다. 박태준은 일본의 3대 철강회사 사장과 소유주를 따라다니며 막무가내로 기술이전을 요구했다. 철강회사 소유주들은 박태준이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에 맞추어서 휴가를 잡아 피해 다녔으나 휴가지까지 찾아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이때 일본에서도 한국에 제철소가 생겨도 수십 년 내 일본 수준을 절대로 못 따면 잡을 것이고 인접국에 철강 산업이 생기면 긍정적 효과도 있을 것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천우신조였다. 박태준은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기둥 하나가 잘못 세워질 때마다 가차 없이 폭파하는 그의 완벽주의 속에 제철소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6월 9일 구호들은 모두 현실이 됐다. 마침내 제1고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이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밀어붙였고 박태준에게도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박태준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포항으로 사람을 보내서 설득했으나 제철소 하나만으로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보고를 들은 박정희도 박태준은 원래 그런 친구이니 건드리지 말고 놔두라고 지시한다. 정치에서 벗어나 제철소에만 신경 써오던 1992년 포항제철은 연간 2100만 톤 양산체제를 구축에 성공한다. 철강 강국을 향한 베이스캠프 구축에 성공했다. 박태준은 기념식 다음 날인 10월 3일 개천절에 국립묘지 박정희의 묘역을 찾는다. 이 자리에서 박태준은 한지에 붓글씨로 쓴 보고문을 낭독했다.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주시옵소서."
이후 포항제철은 세계 최강의 철강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날개를 달았다. 글로벌 철강 분석 기관 'WSD'는 2011년 세계 34개 철강사 대상으로 기술력·수익성·원가절감 등 23개 항목을 평가, 포스코를 세계 1위 철강사로 선정했다.
진성리더이자 급진적 거북이로서 인간이나 기업은 시간 여행자들이다. 인간으로서 시간여행은 삶에서 존재목적을 깨달은 제2의 탄생 순간부터 삶의 개입이 끝나는 죽음까지다. 직장인으로서의 시간여행은 직장에서 공유된 목적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부터 회사에서의 개입이 끝나는 정년퇴임까지다. 기업의 시간여행은 기업이 사명을 정하고 사명을 실현하는 기간인 100년간의 기간이다. 100년이란 시간은 세월로부터 갖은 영욕을 견디며 약속한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간이다. 100년 기업이라는 이름은 시간의 검증을 끝난 기업에 보내는 헌사다.
우리가 삶에서 개입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죽는 순간이고 직장인인 경우는 정년퇴임 하는 순간이고 기업은 100년이다. 개입이 끝나는 가장 먼 미래인 죽음의 순간 정산되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가까운 미래, 현재, 과거를 기울기가 있는 삶으로 연결할 수 있는 목적함수를 가진 사람과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구가한다. 시간 여행자들은 마지막 미래에 정산할 목적에 대한 약속을 현재로 가져온다. 목적의 밀알을 통해 미래에서 현재로 이르는 길을 만들어낸다. 시간 여행자들은 진성리더로서 여행을 처음 시작한 과거도 현재로 업데이트해서 목적의 밀알이 심어질 수 있는 토양을 비옥하게 가꾼다. 시간여행이란 과거를 업데이트해서 현재로 연결하고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서 연결하는 작업이다. 시간 여행자는 과거를 연결해 오래된 새길을 만들어내고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미리 가본 길의 지도를 만들어낸다. 지도술사의 작업으로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연결되어 시간여행의 행로가 결정된다. 시간 여행자들의 성과는 과거, 미래를 현재로 연결해 목적에 대한 약속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약속에 담긴 변화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이 변화를 통해 회사와 사회와 가족과 이웃의 행복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를 따지는 장기적 과제를 통해서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구별해낼 때 착안하는 말이 빨리 빨리다. 빨리 빨리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서 때문에 만들어진 한국인에게 고유한 행동성향이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다가도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이면 줄을 허물고 먼저 타기 위해 버스가 서기도 전에 달려간다. 타지 못할 것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자리확보에 대한 불확실성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도 문이 닫히고 있는데 문닫힘 버튼을 계속 누른다. 문이 제시간에 안 닫혀 목적한 층에 못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 심리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장기적 시간여행자의 관점을 상실했다. 삶의 개입이 끝나는 순간 목적에 대한 약속을 기대치로 성과를 계산하는 장기적 시간 여행자의 관점을 상실하고 과거와 미래가 분절된 현재에 모든 여력을 집중해 초단기적 관점의 시시포스 돌 굴리기에 몰입한다.
진성리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하기 위해 호시우보(虎視牛步), 우보천리(牛步千里 ), 선승구전(先勝求戰), 제심합력(齊心合力)이라고 알려진 급진적 거북이 전략을 사용한다. 목적에 대한 믿음에서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집중력을 가지지만 목적에 도달하는 방식은 소처럼 우직하게 우보천리한다. 목적에 대한 믿음을 밀알로 심고 다른 밀알에 대한 기회비용을 포기할 때 불확실성이 사라진다. 사실 공공선을 지향하는 목적에 대한 믿음만큼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제거해주는 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 실패할 수 없는 징검다리를 놓은 우보천리도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선승구전에 대한 믿음도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기제다. 공공선을 지향하는 목적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고 설사 지금 실현이 안 되어도 다른 누군가가 실현할 목적에 징검다리를 제공한 것이다. 선승구전을 위해 제심합력으로 나서는 급진적 거북이 전략도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강력한 기제다. 선한 목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전문적 역할에 책무성을 가지고 목적을 위해 협업하는 사람들은 혼자의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하는 사람이 겪는 불확실성에서 자유롭다.
급직적 거북이 시간 여행자 전략은 최근 글로벌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아리 왈락(Ari Wallach)의 롱패스(Long Path) 전략에서도 등장한다. 최근 자신의 저서 『롱패스: 장기적 사고의 힘(Longpath: Becoming The Great Ancestors Our Future Needs)』에서 아리 왈락(Ari Wallach)은 롱패스 전략을 삶의 목적을 자신이 사는 동안 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을 넘어서 후세에게 삶의 바통을 떨어트리지 않고 넘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왈락은 회사가 단기적 실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롱패스의 관점을 놓쳤을 때 생긴다고 진단한다.
미래, 현재, 과거를 연결해 후세에게 자신의 바통을 넘긴다는 초 시간여행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준거로 삼는 자신의 시간만을 미시적으로 고집할 때 초단기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왈락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는 과거를 대표하는 X세대, 현재 세대를 대표하는 MZ세대, 미래를 대표하는 알파 세대가 자신의 시간의 틀 안에서 싸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과거가 시간의 준거인 X세대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감을 느낀다. 놓친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빨리 빨리를 외친다. 알파세대는 미래에 준거를 두고 있어서 시간이 느리게 진행됨을 느낀다. 자신의 세대가 주인공이 되는 시대가 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빨리 빨리를 외친다. 현재에 고착된 MZ세대는 현재와 현재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빨리 빨리를 외친다. 비교적 장기적 관점을 가진 알파 세대도 자신들을 이어받아 회사에서 일할 다음 세대를 준거로 삼는다면 초단기적 관점이다. 후세에 바통을 남겨줄 세상을 위해 일하는 롱패스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초단기적 삶에 몰두하는 셈이다.
초우량기업의 경영자들도 단기적 실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은 회사의 과거와 먼 미래를 연결하는 장기적 여행이라는 맥락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현재를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를 안다.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장기적 시각이 이들 경영의 날줄이고 이런 날줄 속에서 현재를 연결하는 단기적 시각이라는 씨줄을 이용해 지속 가능한 실적을 만들어낸다. 단기적 실적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CEO는 과거와 미래가 사라진 고립된 현재만을 보고 경영한다. 지속 가능한 성과도 놓치고 성과가 나지 않으면 결국 좌충우돌 몰아치다 사고를 낸다.
시간여행이라는 롱패스의 관점을 반영해 사업의 표준을 세운 사람이 파타고니아를 이끄는 이본 쉬나드 회장이다. 파타고니아는 노스페이스, 콜롬비아스포츠와 더불어 다양한 아웃도어 관련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미국 3대 기업이다.
등산가였던 이본 쉬나드 1963년 주한미군으로 파견 시절 북한산 인수봉에는 '쉬나드 A'와 '쉬나드 B'라는 암벽등반 코스를 개척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1973년 그가 등반할 때 사용할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면서 시작된 브랜드가 바로 '파타고니아'다. 파타고니아의 공식적 사명은 후세에게 물려줄 “지구를 구하는 일(We’re in business to save our home planet)”을 비즈니스로 하는 것이다. 최근 이본 쉬나드는 후손에게 물려줄 지구가 유일한 주주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자신과 가족이 가지고 있던 4조2천억에 달하는 비상장주식 전액을 지구를 구하는 일을 하는 환경단체와 비영리 단체에 나눠서 기부했다.
의결권 주식은 회사의 존재목적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파타고니아 존재목적 트러스트(Patagonia Purpose Trust)’에, 모든 비의결권 주식은 비영리 환경단체 연합인 ‘홀드패스트 컬렉티브(Holdfast Collective)’에 귀속시켰다. 이번 결정으로 자신이 설정했던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업한다는 사명은 누구의 개입으로도 바꿀 수 없는 목적함수로 고정되었다. 회사를 상장시켜 기업가치를 키워 더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주주로 들어온 사람들의 요구로 기업의 목적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구하려는 존재목적의 약속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타고니아는 일찍부터 매출의 1%를 지구세라고 명명해 환경단체에 의무적으로 기부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런 긍정성 때문에 파타고니아 등산 조끼는 금융위기 때 월가의 증권맨들이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일상근무복으로 즐겨입었다. 파타고니아는 여론조사 기관 더 해리스폴과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가 매년 공동 설문을 통해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에서 2023년 1위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시간여행자의 롱패스 관점을 실천했던 진성리더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 병에 걸렸어도 치료하지 못해 죽어가는 국민을 살려내기 위해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한 유일한 박사는 평생을 국민의 아픔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사업에 헌신했다. 회사설립 후 종업원 지주제 등 한국 기업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목적을 앞세운 근원적 변화의 쇄빙선 역할을 해왔다. 1926년에 설립해서 1962년에 주주회사로 전환했다. 유한양행은 2014년 제약기업 최초로 매출 1조 클럽을 달성했다. 1971년 3월 11일 영면한 유일한 박사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첫째, 손녀 유일림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땅 5000평을 준다. 이 땅은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동산으로 꾸며라. 셋째, 내 소유주식 전부는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호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시간여행이라는 롱패스 관점을 택한 경영자들은 단기적 시각이나 장기적 시각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경영하지 않는다. 기업으로서 가장 먼 미래에 도달하는 100년 기업이 되었을 때 후세에게 유산으로 실현해 넘겨주어야 할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초 장기적 지도를 가지고 기업을 경영한다. 현재의 생존만 생각해 생존이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어 지속 가능한 번성을 만들어가는 통로라는 시간 여행자로서의 관점을 놓치면 누구나 초단기적 실적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구성원을 태우고 달리는 CEO가 자신 회사의 버스를 단기적 초보운전자의 관점으로 운행하고 있다면 버스에 탄 구성원들은 엄청난 멀미에 시달릴 것이다. 이런 회사의 구성원들을 평생 시시포스의 돌 굴리기에 동원된다. 이들이 지속 가능한 실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 여행자로서의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과거와 미래가 분절되고 현재 속에서 갇혀서 쳇바퀴의 공회전을 가속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시간에 쫓겨서 단기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쫓기면 쫓길수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는 시간여행자의 관점이 필수적이다. 자신이 그렇게 옳다고 믿고 전력 질주해서 달려온 수천 리 길이 마지막 순간에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잘못된 길이였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비극은 없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기제인 목적에 대한 믿음 없이 빨리빨리 전략으로 남을 이겨서 일등이 되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포스코 박태준 회장,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파타고니아 이본 쉬나드 회장이 선보인 급진적 거북이 전략이란 목적지에 대한 믿음은 급진성을 갖지만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거북이처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미래와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갖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찾아서 남들이 간섭할 수 없는 자신의 울타리에서 만들고 이 안에서 조용조용히 목적성과를 달성하고 목적성과를 지렛대로 삼아 울타리를 넓혀가며 실현한 목적의 바통을 후세에게 넘겨주는 시간여행을 마무리한다 . 진성리더는 아무리 큰 변화라도 단박에 완성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촘촘한 다리를 사부작사부작 완성하면 이루지 못할 변화는 없다는 강건한 믿음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