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18 20:54
[N.Learning] 들뢰즈는 왜 프로이트를 까는가?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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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왜 프로이트를 까는가?
박 성 옥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은 『앙티 오이디푸스』에 이어 “자본주의와 분열증”을 분석하는 책이다. 들뢰즈 책은 오독하기 쉬운 책이다. 얼마나 낯선 개념들이 많은지 이분법이 아니라 이분법 할아비라도 데려와서 이해하고 싶어진다. 분할선과 도주선, 절단과 단절, 지도와 사본, 파롤과 랑그, 무리와 군중, 짧은 기억과 긴 기억 등 이분법적 대비는 물론 “책을 양화하라”든지 “우리는 충분히 추상화되지 못했다”라든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많다. 들뢰즈는 철학계의 아이돌답게 알아듣기 힘든 랩을 쏟아낸다. 하지만 리좀 대 나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이미지화해서 읽거나 이분법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 들뢰즈는 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정신분열증을 이야기하는가? 2장의 제목으로 쓰인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의 문제는 왜 중요한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지점을 살펴보았다.
1. 가족삼각형으로 되돌아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프로이트의 환자 중에 일명 늑대인간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부자청년이 있다. 그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는 유아기 때 늑대가 나타나는 불안몽을 꾸었다. 프로이트는 그가 한 살 때 부모가 짐승처럼 뒤로 섹스하는 걸 보았던 체험과 늑대가 나타나는 꿈을 연결시켜서 해석했다. 꿈에는 나뭇가지 위에 일곱 마리 늑대가 나타났다. 프로이트는 그 중 한 마리만 늑대일 뿐 여섯 마리는 아기염소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아버지를 표상하는 대체물이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의 병명을 신경증이라고 선고한다. 거세공포를 야기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열망이 억압된 충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삶의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일종의 무의식적 성에너지로 보고 이를 리비도라 불렀다. 리비도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발현되는 게 정신병증이다. 엄마와 섹스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거나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결핍감이 리비도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는 성기의 대체물을 찾아 “양말을 질에, 흉터를 거세에 겹쳐놓는”(60쪽) 환자들, 섹스에 무관심하거나 비정상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히스테리 환자를 모두 억압된 성욕으로 인한 신경증환자로 분류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것은 높이 인정한다. 프로이트의 공로는 인간의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성 아래에 더 큰 충동, 본능, 욕망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밝힌 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아버지, 거세, 결핍 등의 개념으로 기표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프로이트도 늑대인간 속에 공존하는 리비도적 흐름들의 다양체를 알고 있었다.”(69쪽)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 다양체를 하나의 표상으로 환원시켜서 늑대를 ‘아버지’의 대체물로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아는 건 오이디푸스화된 늑대와 개, 거세하는 자이자 거세된 자인 아빠-늑대뿐이다. 무의식은 다양한 욕망체인데 정신분석학은 다양체를 으깨어서 하나의 통일체로 납작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욕망이다. 인간에게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다양한 욕망이 출렁인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접속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이 생성되는 욕망기계다. 들뢰즈는 이 욕망을 하나의 삶의 본질이며 존재의 본성으로 보았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혹은 니체의 ‘힘의 의지’와 비슷한 개념이다. 본능적 욕망끼리 부딪쳐서 가장 강한 충동이 행동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욕망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선 행동, 후 인식이다. 무의식 속의 가장 강한 욕망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가 우리의 주체를 구성한다.
현대의학은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 부른다. 줄을 고른다는 뜻이다. 악기의 줄을 잘 조율해야 좋은 연주가 되듯이 정신줄을 놓치면 분열증이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분열증은 조금 다른 맥락이다. 들뢰즈는 하나의 표상으로 영토화하려는 욕망을 편집증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탈영토화하려는 욕망을 분열증으로 보았다. 욕망은 하나의 중심으로 영토화하려는 편집증과 주변으로 달아나려는 분열증을 거듭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기표를 만들어서 욕망을 가족 안으로 귀결시킨다. 가족은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작이다. 아버지의 질서를 내면화하면서 주체가 성립된다. 그 결과 정신분석은 욕망을 결핍으로 여기게 하고, 가족삼각형 안으로 욕망을 가둔다. 자본주의 국가는 가족을 단위로 욕망을 관리하면서 견고해진다. 그래서 들뢰즈가 자본주의를 가동시키는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국가, 가족, 도덕, 시스템, 사회가 만들어내는 욕망의 중심부를 벗어나서 주변부로 달아나는 분열증적 욕망이 필요하다고 한다. 진짜로 정신줄 놓고 칠렐레 팔렐레 하라는 말은 아니다.
2. 배치에 따라 생성되는 다양체
두 번째 질문.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의 문제는 왜 중요한가? 들뢰즈는 무의식과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말하기 위해 늑대가 무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늑대가 무리지어 다닌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면서 자유연상기법을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늑대들에게서 다양체를 제거하고, 아기염소에 불과한 늑대로 환원시켜서 무리를 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 프로이트는 늘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인 아버지, 결핍, 거세 등으로 돌아간다.
들뢰즈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 분열자들은 하나의 욕망,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지으려는 영토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이다. 탈영토화하는 분열자들은 늑대무리의 웅성거림을 아빠의 목소리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늑대들 중의 한 마리 늑대가 된다고 느낀다.”(70쪽) 이 대목을 읽고 나는 들뢰즈가 늑대인간의 내면에 늑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으로 꿈을 해석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석하면 프로이트가 늑대를 아빠라고 규정한 것 못지않게 무리한 해석이 된다. 이 꿈은 늑대가 되고 싶은 외침이 아니다. 심지어 늑대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표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게 무의식이다.
들뢰즈는 늑대가 무리임을 중시한다. 늑대는 언제나 무리 속에 존재한다. 늑대는 표상이나 대체물이 아니다. 늑대들은 늑대인간의 기관 없는 몸체 위에 있는 하나의 강렬함을 가리킨다. “무의식에는 부정적인 것이 없으며 영점에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움직임만이 있다. 여기서 영점은 결핍이 아니라 받침대로서의 충만한 몸체의 긍정성을 표현한다.” (69쪽) 강렬도란 어떤 것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충만한 상태다. 강렬도에서 중요한 것은 거리다. 그 거리가 차이다. 얼마나 다양한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차이와 생성은 뭔가 계속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이 되기”가 아니라 일종의 변이에 가깝다.
두 유형의 다양체가 있다. 군중과 무리다. 군중은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이며 영토성을 이룬다. 군중 속에 있는 주체는 중심으로 가까이 가려한다. 군중 속 개체는 언제나 집단에 동일화되고, 우두머리에 동일화된다. 우두머리는 획득한 것들을 축적하고 자본화한다. 이에 비해 무리는 주변부에 존재하는 분열자이다. 무리는 수가 작고 흩어져 있으며 탈영토화하려 한다. 각자는 패거리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영위한다. 군중과 무리는 다른 성격의 삶과 사회를 만든다. 중심으로 모이는 군중의 영토성이냐, 주변으로 흩어지는 무리의 탈영토화냐?
문제는 군중과 무리가 따로 분명하게 나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들뢰즈는 군중과 무리라는 두 다양체를 이원론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동일한 배치 속에서 작동하는 다양체들의 다양체”(74쪽)만 있을 뿐이다. 무리는 군중 속에 있기도 하고, 군중은 무리 속에 있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의도적으로 군중과 무리 중에서 택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중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혼자 있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아니라 “공존하며 서로 침투하고 자리를 바꾸는 다양체들의 유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77쪽).
우리는 무의식을 만드는 사회적 배치물에 사로잡혀있다. 들뢰즈는 무의식에 대해 말한다. “개인적인 언표는 없다.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그 배치물은 근본적으로 리비도적이며 무의식적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 안에 있는 무의식이다.”(78쪽) 무의식은 욕망을 생산해내는 잠재적인 서식지이다. 무의식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다양체가 된다.
그래서 다양체인 존재에게는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모든 존재의 본질은 접속을 통해 자기변이를 하고 있다. 니체는 이것을 ‘임산부의 잉태’에 비유했다. 자기가 아닌 상태가 되는 것.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자기가 아닌 것을 품고 있다. 존재는 다양체(multiplecity)다. 존재가 다양체이듯 세계도 다양체다. 이질적인 것을 품고 있지 않는 동일자는 없다. 이질적인 것을 담고 있는 존재는 어떤 것과 접속 할 때마다 배치가 달라지면서 새롭게 생성되는 다양체이다.

[출처] 들뢰즈는 왜 프로이트를 까는가?|작성자 ok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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