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차이와 틀림을 분별하지 못할까?
정신모형의 존재에 대한 각성
아래 그림은 비트겐스타인이라는 언어철학자가 만든 토끼와 오리가 같이 보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놓고 토끼나라 사람과 오리나라 사람이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서로 논쟁이 붙었다고 가정해보자. 토끼나라 사람들은 오리를 본적이 없고 오리나라 사람들은 토끼를 본적이 없다. 토끼나라에서 온 사람은 오리를 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토끼라고 주장할 것이고 오리나라에서 온 사람은 토끼를 본적이 없으니 오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보은 것은 이들 머리 속에 그려진 지도에 해당하는 정신모형의 작용이다. 우리는 우리 오감을 통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고 믿지만 자신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려진 지도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토끼나라 사람들의 머리에는 오리의 지도가 없고 토끼의 지도만 있다. 오리나라 사람들의 지도에는 토끼는 없고 오리만 있다. 이들이 서로 같은 대상을 보고 오리로만보고 토끼로만 보고 싸우는 이유다.
이런 소통의 문제와 갈등은 서로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이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진 상대의 정신모형과 나의 정신모형의 지도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서로 다른 정신모형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소통과 갈등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상대의 지도인 정신모형과 나의 지도인 정신모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상대가 토끼를 오리라고 이야기하거나 오리를 토끼로 이야기하는 것을 경험의 차이가 만든 정신모형의 차이로 쉽게 인식한다. 하지만 정신모형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도 나와 같은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상대가 나와 다른 것을 보았다고 주장할 때 상대가 본 것은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정신모형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름을 틀림으로 왜곡한다. 정신모형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역지사지를 내세울 때 문제는 더 치명적인 문제로 전락한다.
소크라테스는 네가 본 세상이 전체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 즉 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편협된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신모형에 갇힌 세상이라는 것을 알라고 경고한 것이다.
자신의 정신모형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 세상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의 방식으로 운용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과 다른 정신모형을 가진 방문객들을 자신의 집에 들이기 전에 자신의 신체에 맞춘 침대를 만들어놓고 침대길이보다 작은 사람은 발을 늘이고 침대보다 더 긴 사람들은 손발을 잘라내서 자신의 정신모형 속에 맞추는 고통을 가한다. 편견과 아집과 고정관념이 시작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에서 나왔다.
지금 이동권 문제를 놓고 장애인과 이준석 대표가 벌이는 논쟁도 비슷하다. 이준석 대표는 장애인이 자신과는 다른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자신과 같은 대한민국의 30-40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남성들을 범주화한 평균 정신모형을 표준정신모형이라고 규정하고 이 다수 사람들의 삶에 방해가되는 말을 하거나 태도를 보이거나 행동을 하면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규정한다. 장애인들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뉘워놓고 이들을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 맞춰 팔다리를 잘라낸다.
정치가가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받으려면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도 정치공학에 의해서 숫자를 계산하는 공리주의의 초보적 윤리기준을 넘어서 양심의 가책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긍휼의 관점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긍휼감이 없는 리더가 정치공학적 공리주의로 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하면 나라는 고통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동권을 놓고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려야하고 이 혜택을 위해서는 소수자가 겪는 불편은 더 많은 정상인들이 누리는 혜택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공리주의적 발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이 장애인이어서 이들의 겪는 고통에 대해 조금만 양심의 가책이 있고 이것을 기반으로 긍휼의 마음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문제를 이렇게 고식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표에 도움이 되는 머릿수를 세는 정치공학을 넘어 소수도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더 근원적 원인을 찾아서 정치가로 더 혁신적 방안을 내놓을 것이다.
장애인과 소수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긍휼감이 없는 정치가가 공리주의와 결탁해 정치공학으로 숫자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할 때 나라는 서서히 고통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이준석 대표가 정치를 계속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럴게 말하도록 조정하고 시키는 자신의 정신모형이 실제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부모가 물려준 자신 머리에 대한 우월감에 취해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자신의 정신모형의 추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쏱아내는 발언들이 지금과 같은 소모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국민이 모두 사랑하는 한 가족이라면 그리고 정치가가 가족의 가장 역할을 자청한 것이라면 가장은 온전한 자식보다는 아픈 자식에게 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아픈 자식이 자신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신경증에 취해 자식의 아픔에 대해 눈을 감는 가장이 무슨 가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