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신학교 경건 예배에서 왓슨 박사(Dr Watson: 미국 RTS 전 부학장, 파라마씨티교회 담임, 우크라이나 신학교 교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청교도적이요, 개혁주의적이어서 발췌하여 올립니다.

영국에서 청교도는 1620년 미국에 건너와서 1636년 하버드대학교를 세우고 영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하버드대학교는 세속주의 대학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안에는 신학교 부설이 있지만 그 대학교 교수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노코멘트입니다.

(하버드는 보스턴 근교의 케임브리지라는 작은 타운에 위치한 미국 최초의 대학이다. 1636년 매사추세츠 식민지 일반의회(General Court of Massachusetts)의 결의에 따라 설립됐다. 1639년 400권의 책과 유산 780파운드를 기증한 존 하버드(John Harvard·1607~1638) 목사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로 명명했다.)

그러면 왜 그 왕성했던 퓨리터니즘(청교도 운동)이 사라져 버렸는가입니다. 토양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경건의 자료로 삼지 않을 때 교회는 직장이 되어 버리고 목회자는 직업꾼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는 직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의 방법을 전수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님에 의한 생산적인 믿음을 전수하여야 합니다.

미국에서 부흥의 파도를 일으키는 제목으로 '목적이 있는 삶'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되려면 목적 있는 삶이 퍼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Key 없는 교회가 된다고 합니다. 인본주의적 목적 선언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적이 아닌 복음을 가지고 설교하셨습니다. 진실한 기독교는 복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이 되어야 주님의 목적 선언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목적 선언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복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안에서 퓨리턴주의로 사는 눈에 보이는 잘못된 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강직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옥죄고 할퀴고 온갖 율법을 적용하여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파가 유대교를 망하게 한 것은 자기들도 질 수 없는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유주의입니다.

여기서 자유주의란 "쉽게 하세요", "맘대로 하세요" 하는 식의 풀어 주기 주의를 말합니다. 이 자유주의의 '3강점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과 상황과 각자의 마음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상황과 각자의 마음에 따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퓨리턴은 믿음과 행위가 절대적인 규범이지만 3강점신학의 조류는 성경이 오직 규범이 아니고 상황과 마음이 종합된 곳에서 만나야 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절대적인 규범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정상적으로 일할 때 성경이 정상적이라고 유추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간음하지 말라"고 한 것을 저들은 "너희는 정상적으로 음행하지 말지니라"(정상적으로 결혼했을지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음행이기 때문에 이혼하라는 주문)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을(요 14:26) 버리고 사람이 어떻게 가르치며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잡지로 <크리스차니티 투데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한국에 오면서 비행기 내에서 큰 타이틀을 보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이혼을 정확하게 보라" 하고 부제목으로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둘로 나눌 때"라고 했습니다. "둘로 나누지 말라"를 거스르는 대목입니다. 잡지는 유대인의 전승을 끌어들여 전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이 재미없으면 걷어차 버려라" 입니다. 모세 때부터 아내를 내버리던 버릇을 오늘날에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고문에는 구약 유대인 이혼법이 신약에서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현대에는 이혼만이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상처 주지 말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혼이 죄라고 보기보다는 좋은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미국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죽을 때까지'를 전제로 하는 것 아닙니까? "생명을 다할 때까지 서로 사랑하라"가 전제 아닙니까? 그러나 미국의 복음주의는 결혼식에서마저도 "행복하게 살 때까지만"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예절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는 분은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이혼하라고 부추깁니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는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잡지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미국의 퓨리턴주의는 속절없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표적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란 표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큰 표적으로 요나의 표적(눅 11:29)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체험하거나 경험하는 표적을 자랑하는 것에 사용하지 말고 주님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표적을 주시는 것은 두 가지 모습으로 목적을 나타내는 표적이요 영적인 표적입니다. 여러분이 경험이나 체험하는 표적이 나타날 때 말씀에 던져 버리십시오. 자신을 높이 띄우려 하지 말고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표적을 자랑하던 이들이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경우를 보는 것은 말씀 위에 자신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구약에 뱀에 물린 자들이 놋 뱀을 바라볼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때까지 구리 뱀을 보관하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 때까지도 보관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루 내어 버렸습니다. 우상을 철저하게 가루 만들어 없애 버려야 합니다. 

성지 순례자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고 무덤을 가고 열심을 내고 어디를 가든지 고개 숙여 기도를 하고 하는 것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섬겨야 하지 그런 물건들이 예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때 예수님의 세마포 '토린 의상'이 나왔다고 귀하게 여기고 난리를 쳤습니다. 검증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물품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지에 갔을 때 물건에 경배하지 말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한 청교도는 경건함으로 오직 주님께 경배하는 자입니다. 

예전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예전주의는 퓨리턴주의를 없어지게 만듭니다. 예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금식, 기도, 성경 읽기 등의 어떤 의식화가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해야 내가 성도가 되기에 한다고 사로잡히는 것은 의식화된 신앙입니다. 습관화는 심벌이 됩니다. 세례가 죄 씻음의 상징 예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이신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식화된 습관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퓨리터니즘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설교가요 <전도폭발>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제임스 케네디 목사가 플로리다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점점 빠져들어 가면서 교회에 많은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하나님의 능력도 복음의 능력도 아닙니다.

이석봉 / 수원신학교 성경원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