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리더는 긍휼의 태반을 가지고 있을까? 리더의 긍휼감(Compassion) 리더는 협업을 통해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보다 더 큰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협업만 동원할 수 있다면 리더의 생각을 토대로 아무 자원이 없어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리더가 무에서 유의 기적을 만드는 비밀은 타인의 재능과 능력을 공동의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협업 능력이다. 협업능력은 긍정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어서 긍휼감과 공감능력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관계와 협업을 동원하는데 결정적인 리더의 긍휼감(Compassion)과 공감(Empathy)는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길러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긍휼감(Compassion)과 공감(Empathy)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긍휼감(Compassion)은 Com과 Passion이 합쳐진 단어다. Com이란 같이 혹은 함께 한다는 뜻이고 Passion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Compassion이란 고통을 함께 한다라는 뜻이다. 긍휼감의 학문적 정의에서는 행동 측면이 부각된다.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수준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 행동이 일으켜 질 때 긍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Compassion을 한층 더 깊이 분석해보면 이 단어 속에는 Compass(나침반)라는 음절을 담고 있다. Compassion에는 단순히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을 넘어서 올바른 방향(나침반, 진북, 진실)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하는 행동이라는 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진성리더십에서 정치적 편을 들어가며 남을 재단하고 편견을 휘두르는 것을 가장 위험한 행동으로 규정하지만 굳이 편을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긍휼감이 이끄는 방향대로 가장 아픈 사람편을 들라고 조언한다. Compassion 속에는 Compass(나침판)이 들어 있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긍휼이 이끄는 방향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긍휼감은 일반적인 희노애락애오욕의 일반 정서와 구별되는 고차원의 윤리적 정서다. 긍휼감은 공감(Empathy)이나 위로(Sympathy)와도 구별된다. 공감(Empathy)은 상대의 정서를 이해하는 인지적 수준의 감정이다. 슬픈 영화를 보면 슬픔을 이해하고 슬퍼하지만, 곧 바로 웃기는 장면으로 장면이 전환되면 방금 슬퍼했다는 사실을 잊고 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웃어야 할 상황인지 울어야 할 상황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보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동참할 개연성이 높지만 공감은 일관된 행동에 대한 전제가 없는 단순한 인지적 역량이다. Sympathy(위로)는 공감보다는 더 행동적이다.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것을 이해하고 같이 울어주는 Empathy를 넘어서 상대의 손을 잡아준다. 행동을 함축하고 있지만 Sympathy는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결과의 수준에서 아픈 사람에게 진통제를 나눠주거나 상처의 곪은 부분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수준이다. 집이 없어서 비를 맞고 있는 상대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나눠주는 수준이다. 긍휼감을 가지고 있다면 우산을 나눠주기전에 상대가 왜 비를 맞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같이 비를 맞는다. 원인이 파악되면 공동으로 비를 피하는 방법을 찾아서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 긍휼감의 본질이다. 긍휼은 진실의 씨앗을 발아시켜 키워내는 태반이다. 긍휼의 태반에서 품어진 것들은 돌이라도 보석으로 거듭나고, 단순한 지식도 지혜로 거듭나고, 이기적 재능도 현능함으로 거듭난다. 긍휼감은 리더가 세상의 씨앗을 받아들여 진리로 길러내는 태반이어서 세상의 모든 근원적 변화나 혁신적 변화를 추적해보면 대부분 긍휼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고 여기서 키워지고 여기서 자라났다. 지금까지 세상을 바꾼 모든 변화는 누군가의 긍휼의 자궁 속에 변화의 씨앗으로 발아되어 과일나무로 길러진 결과물이다. 한 마디로 긍휼은 진리가 잉태되는 자궁이다. 긍휼감은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길러질 수 있는 것일까? 유전과 환경에 대한 논쟁을 인용하면 모든 것은 50대 50이어서 가지고 태어난 것이 50이고 길러진 것이 50일 개연성이 높으나 긍휼감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측면이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는 특성이다. 상대의 고통과 감정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공감(Empathy)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위로(Sympathy)는 타고 나지 않고 훈련을 통해도 충분히 실현내 낼 수 있는 정서적 역량이지만 긍휼감은 타고난 측면이 받쳐주지 않는데 배우고 훈련받은 것만 가지고 쉽게 발현되거나 채워질 수 없는 능력이다. 타고난 측면이 강한 특성(Trait)으로 분류된다. 진성리더(Authentic Leader)는 긍휼과 목적의 상호작용을 통해 약속한 변화를 실현한다. 진성리더에게 몸은 긍휼의 태반이고 존재목적은 이 태반에서 키워지는 정신의 씨앗이다. 진성리더는 존재목적이라는 씨앗을 자신의 긍휼의 태반에 수태시켜 다윗으로 길러내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진성리더는 긍휼의 태반에서 자란 것만 목적을 실현시킨 진리로 성장한다는 원리를 안다. 긍휼감의 태반이 없는 리더가 공감이나 위로 등으로 마치 긍휼감이 있는 것처럼 연기할 수는 있으나 자신에게 배태된 씨앗을 진실이 담긴 근원적 변화로 키워내지는 못한다. 긍휼감은 고사하고 공감과 위로 능력조차도 없는 리더가 재능만 가지고 있을 때는 소시오 패스의 성향을 가진 독성리더가 된다. 이런 리더를 추앙하고 있는 사회는 사회적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소시오 패스급의 리더를 연구해보면 십중팔구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에 대한 긍휼감조차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이 현능한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솔로몬 대왕의 공정성에 대한 판단이 솔로몬을 긍휼의 태반에서 법적 판단을 넘어 공의로움으로 키워졌기 때문이다. 예수가 기독교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예수의 타고난 긍휼의 태반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이 양자역학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뉴튼의 지식이 아인쉬타인의 긍휼의 태반에서 통찰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명한 세종이 한글까지 창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타고난 총명이 긍휼감 속에서 수태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통찰은 기존 카리스마 리더십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리더십 연구는 카리스마 리더를 Personalized Charisma와 Socialized Charisma로 구분해왔다. 여기서 카리스마는 신이 특정한 사람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지칭한다. 카리스마에 대한 연구는 은총인 카리스마(Charisma)가 긍휼 속에서 수태될 때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카리스마(Socialized Charisma)로 길러지지만 탐욕의 태반에서 수태되어질 때는 독성이 있는 카리스마(Personalized Charisma)로 자라난다고 설명한다. 설사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도 긍휼의 태반이 없는 사람에게 진실의 씨앗이 수태되어 이것이 크게 발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긍휼의 따뜻함이 결여된 자궁에서 배태된 모든 것은 사산아로 뱉어진다. 현명한 사람들은 아직 형태가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이 긍휼의 태반에서 길러낸 신토불이가 아니라면 믿음을 주지 않는다. 이 속에서는 진리의 씨앗을 수태되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감이나 위로수준에 머무는 사람들보다 긍휼의 태반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사기꾼의 사기행각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다. 긍휼의 태반이 없는 리더가 내두르는 질책은 구성원에게 칼춤으로 작용하고 리더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긍휼의 태반이 없는 사람에게 높은 직책을 주면 이들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칼춤을 춰 사회적 참극을 일으킨다. 사회적 참극은 부메랑이 되어 반드시 장본인을 무너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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