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26 08:30
[N.Learning] 고통의 어떻게 고단위 정서 에너지로 정제되나?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267  
고통의 어떻게 고단위 정서 에너지로 정제되나?
긍휼, 자비, 측은지심의 힘
우리는 생존과 번성을 위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고통이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이다. 고통은 인간이 살아 있음에 대한 증거다.
고통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필연임에도 실제로 고통이 부과되면 모두가 고통으로부터 면죄되기를 기대하며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삶을 택한다.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고통에 거적을 덮어놓으면 고통은 곪아 터져 구더기가 생기고 더 큰 고통으로 찾아온다. 고통이 극심해짐에도 거적을 걷어내고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가 없어서 고통을 잊게 만들어주는 진통제와 마약을 찾아 나선다.
시대가 변화와 위기가 상수인 초뷰카 시대로 접어들수록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더 많아지고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도 한계에 도달했다. 실제 건강보험 평가원의 자료를 보면 직장인의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경계성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부과된 문제를 풀지 못해 생긴 고통이 누적된 결과다. 이런 상태라면 어느 순간 고통은 우리 모두의 몸에 질병과 암을 표적으로 남길 것이다.
우리의 삶을 뒤집어보면 모두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노력이다. 요즈음 철학에서 고통이 인간의 본질이자 실존임을 주창하는 쇼펜하우어, 심리학에서 상처 받을 용기를 제기한 아들러, 상처를 받아들이는 취약성(Vulnerability)이 리더의 근력임을 주장하는 브르네 브라운, 경영학에서 조직의 아픔을 감싸는 심리적 안정지대를 주장하는 에드먼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개념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직시하는 용기를 주문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주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공포스러운 일이다. 상처로 인해 발생할 고통에 대한 공포는 방안의 코끼리다. 방에 코끼리가 들어와서 언제 난동을 부릴지 몰라서 코끼리를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방안에 있는 각자는 서로 못 본 채하고 있다. 고통이 무섭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눈에 검은 안경을 씌워 코끼리를 못 본 척한다. 코끼리에 가상의 거적을 덮어놓고 있는 셈이다.
고통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긍휼(Compassion)이다. 긍휼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그냥 아픔에 대한 사랑이지만 학문적으로는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긍휼이란 고통 위에 덮어 논 거적을 들춰내고 고통을 자신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이해하고 이런 이해를 기반으로 고통을 원인의 수준에서 파악해 혁신적 솔루션을 처방하는 정서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긍휼에는 혁신적 솔류션이 작동해서 고통이 해결할 때 느끼는 희열도 포함된다.
고통을 긍휼로 대하기 시작하면 긍휼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생산적 고단위 에너지로 전환된다.
첫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노력은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규율(Discipline)을 만들어준다. 회복탄력성도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내는 규율의 다른 이름이다. 고통에 발딛지 않고 만들어지는 회복탄력성이나 규율은 없다.
둘째, 고통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면 어느 순간 고통 속에서 자신에게 숨겨졌던 삶의 진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 우리를 가리고 있던 먼지 덮힌 눈에 긍휼의 눈물이 흐르면 주변에 비슷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도 선명하게 보이고 이들이 연결되어서 만든 세상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극단적인 고통인 죽음 앞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참회의 눈물로 눈을 닦아가며 삶의 진리를 보는 재탄생을 경험한다. 미리 가본 극단적 고통인 죽음을 긍휼로 이긴 사람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산다. 미리 가본 죽음은 세상의 진리를 보게 하는 축복인 셈이다.
셋째, 고통을 원인의 수준에서 파악해서 솔루션을 만들어낸 윤리적 정서인 긍휼이 우리 사회를 발명품으로 채워 지금처럼 삶을 향유하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 고통을 외면했다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도 고객의 고통을 긍휼로 품고 고통을 해결할 혁신적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싸게 파는 것이다. 세상이 모든 혁신적 디자인 제품은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해결한 디자이너의 긍휼이 만든 것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창조의 희열은 존재하지 않았고 창조의 내재적 희열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문명은 없었다.
구약의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고통도 창조의 희열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다. 착하고 선했던 욥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은 부정적 외재성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편협하게 이해했다. 하나님은 남에게 고통을 부과한 적이 없는 완벽한 윤리적 인간 욥에게 고통의 문제를 윤리적 문제를 넘어 창조의 문제로 승화시켜 세상에 공의로운 가치를 만들어 고통을 이길 수 있을 때 하나님 닮은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기독교인으로 가장 하나님 닮은 모습은 남에게 고통을 안주는 윤리적 인간을 넘어 고통을 긍휼로 품어 공의로운 세상을 창조해 고통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윤리적 인간을 넘어 창조적 인간이 될 때 가장 온전한 기독교인이 된다.
리더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생긴 공동의 고통을 먼저 솔선수범해서 책임지려는 용기를 보이면 조직 구성원들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자신이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을 체험한다. 리더가 고통에 대해 먼저 책임지는 모습은 도덕적 용기다.
각자가 자신에게 부과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근력을 세우고 주체성을 세우려는 노력은 자신에 대한 믿음의 근거다. 자신이 왜 사는 지 삶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고통을 받아 들여가며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다. 자신도 못 믿는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게 신뢰를 얻을 방법은 없다. 이런 사람들이 리더로 등용되면 조직과 사회는 재앙이다.
고흐, 베토벤, 예수의 고통이 생산적이었던 이유이다. 고흐는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 그림을 그렸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고흐 그림의 예술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흐는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가였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극단고통인 귀머거리가 되는 고통을 이겨냈다. 운명을 작곡해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 지금 기독교의 틀을 만들었다. 이들 모두는 고통을 긍휼로 이겨냈다.
기독교에서 Compassion은 긍휼이지만 불교에서는 자비, 동양에서는 측은지심으로 번역한다. 우리가 고통을 넘어 창조적 예술가로 살 수 있는 힘은 모두 긍휼이 고통을 정서적 에너지로 정제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한 책임을 꼬리 자르고 진통제로 연명해가며 고통으로부터 도망쳐 다니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찾는 것이 마약이다. 마약은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가장 비생산적으로 고통을 다뤄나가는 방식이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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