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관종 퇴치 전략
소거(Extinction)
아이가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이 아이는 오랫동안 그네를 타서 그네에 숙달되어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는 그냥 평범하게 그네를 탄다. 그때 주변에 어른이 나타나서 아이의 그네 타는 장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기 시작하면 아이는 달라진다. 있는 묘기 없는 묘기 등 갖은 묘기를 부려가며 그네를 기술적으로 타는 시범을 시연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 아이처럼 잘 보이고 싶고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로 작용한다.하지만 이런 일반적 수준의 인정욕구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관종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자신이 텅비어 있는 정도가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연극성 인격장애로 판정 받는 정도가 되어야 관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외면은 나름 화려해 보이는데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을수록 관종이 될 확률이 높다. 관종은 나름 화려한 외모에 비해 인격이 텅 빈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인격병>이다.
이런 관종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추종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을 청중으로 가스라이팅 시키가며 자신의 관종끼를 충족하기 때문에 종종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는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할까? 이런 관종 퇴출에 자주 사용하는 사회 심리학 전략이 소거(Extinction)다. 소거는 노상원이 썼던 소거와 같은 말로 원인이 되는 싹을 뿌리째 뽑아 제거해 버린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관종끼가 있는 한 학생이 선생님이 이야기만 하면 말꼬리를 잡고 비틀어서 수업 중인 학우를 웃기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학생이 이러는 이유는 자신의 말에 학우들이 반응해 웃어주는 웃음 때문이다. 이런 관종끼를 가진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생님과 학생들이 공모했다. 선생님은 이 학생이 없는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앞으로는 이 학생이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여러분을 웃기려해도 절대로 웃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소거해야 할 대상이 학생들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모 사실을 모르고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말을 꺼내자 이 학생은 다시 선생님의 말꼬리를 잡고 웃기려는 시도를 했다. 공모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두 세 번 지속되자 관종끼가 있던 학생도 더 이상은 수업을 방해할 수 없었다.
대선후보 중 유독 병적인 관종끼를 보이는 젊은 후보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3차 토론에서 관종끼를 과시하기 위해 다른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에게 말로 시비를 걸자 이 후보는 이번 토론에서는 관종끼 있는 후보와 토론할 생각이 없고 다른 후보와 토론하겠다고 선언한다. 관종이 충족되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젊은이가 이 말을 듣고 혼이 나갔다. 이런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급발진해서 한 발언이 젓가락 발언이다. 관종끼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혹독한 처벌이 투명인간으로 취급 당하는 것이다.
이런 괴물을 만든 큰 책임은 성적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체계와 이런 것을 부추기는 언론에 있다. 언론이 이 젊은이의 관종기를 지속적으로 충족시켜 대선후보로까지 만드니 스스로를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착각하는 나르시즘에 빠졌다. 언론이 앞장서서 이 나르시즘에 빠진 젊은이가 공개석상에서 나서서 말로 공격하고 이간질하고 혐오하고 갈라치기 하도록 마이크를 제공한 것이 이 젊은이를 괴물로 만들었다. 결국 언론이 전 국민이 보는 공영방송을 18금 TV 방송으로 전락시킨 공모자들이다.
선거가 끝난 후에는 사회적 스트레스 원천인 이 젊은이를 공공장소에서 보지 않았으면 한다. 방송도 공개 석상에서 이 친구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을 자제했으면 한다. 관종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부정적 외재성을 만드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는 안타깝지만 이 젊은이를 투명 인간 취급했으면 한다. 대한민국에서 인성은 텅 비어 있지만 겉만 화려한 젊은이가 아이들의 우상처럼 취급되는 일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라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