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교수 건의 맥락을 집어보면 조국 교수가 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은 없는 것같다. 대신 아이의 모든 이력에 어머니의 발자국이 보인다. 결국 아이의 삶에 개입해 아이를 자신의 대본의 연기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대부분 역할들도 따지고 보면 다 삼인칭 문법이다. 부모님이 그랬어, 회사에서 본부장이 그러라고 했어, 목사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가 그랬어, 어떤 위인전에도 나와 있어, 과학잡지에 나와있어, 유명한 자기계발서에 나와 있어 등등 내가 수행하는 역할 중 삼인칭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사회, 기득권을 가진 부모, 회사가 삼인칭인 그들이 써논 내 역할에 대한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은 연기대본에 충실하게 삶을 사는 사람을 모범생이라고 치켜 세웠다.
삶의 문법이 <삼인칭>인 그의 문법에서 우리가 전제된 <일인칭> 문법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나의 삶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배워도 이 새로운 것이 일인칭으로 전환된 내러티브가 되어야 자신의 세상을 보는 지도인 정신모형을 업데이트하는 일에 사용되어진다. 아무리 뛰어난 대본을 마련했어도 자신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지식으로 머물다 사용이 빈도수가 떨어져 결국은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모범생의 삶이 자신의 진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도 인생의 중반이 넘으면 깨달겠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일인칭 내러티브는 자신의 삶의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초연결 디지털 스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지금은 한 마디로 답이 없는 세상이다. 답이 있는 세상에서는 답을 빨리 포착해서 외워내는 모범생들이 득세했다면 지금 세상은 자신이 일인칭으로 답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이 답이라고 설파시킬 수 있는 생각의 근력이 있는 모험생들의 세상이다.
상자에 갇힌 모범생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디아스포라를 통해 자신의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모험생의 삶으로 자식들을 이끌어주는 부모가 진짜 진성부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