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2-01 20:52
[N.Learning] 차이가 행복을 만들 때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4  

차이가 행복을 만들 때와 폭력을 만들 때
차이와 다름의 반복

요즈음 우리 연구실의 펠로우들과 공부하고 있는 것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한 통찰을 우리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다양성 연구에 끌어들여 진정으로 다양성이 존중되는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나 조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많이 고민한다.

들뢰즈는 살아 있는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은 차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남성이라는 존재가 존재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여성이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남성이 남성으로서의 독특함을 가진 존재로 드러난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진보는 보수가 곁에 있어야 진보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고 보수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들뢰르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독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은 차이라고 본다. 차이에 대한 편견이 제거된 순수한 의미는 경영전략에서도 차별화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부터 경쟁력의 기반으로 이론화되고 있다.

들뢰즈에게 <반복>이라는 것은 이 차이가 건강하고 강도 있게 드러나게 하는 기제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차이를 잘 묘사한 시인이 윤동주이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에는 차이와 반복의 의미가 잘 은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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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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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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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매일 같은 길을 걷는 반복된 행동을 통해서 길 속에 숨어 있는 차이를 발견하고 이 차이를 통해서 길이 새롭게 살아서 생동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문제는 우리는 반복을 통해서 차이의 의미를 깨달을 수준의 윤동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처럼 차이의 반복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깨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이를 틀림이라고 치부하고 이를 감추고 차이를 잘나네 동질화 시키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왜 우리는 윤동주와 같이 반복을 통해 차이를 깨달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윤동주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기에 반복을 통해서 차이를 깨달고 이 차이를 통해서 길을 생명력이 있는 길로 살려낼 수 있었을까?

윤동주는 우리가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긍휼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을 인정했다. 차이의 반복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깨달게 한 것은 윤동주가 가진 긍휼감 때문이다. 긍휼감은 사랑의 숭고한 감정이다. 심지어는 상대의 고통조차도 내 고통으로 사랑하고 행동을 통해 이 고통을 같이 넘어서려는 성향이 긍휼감이다. 기독교에서는 긍휼로 불교에서는 자비로 유교에서는 측은지심으로 표현된 윤리적 정서다.

차이의 반복을 통해서 삶의 생명력을 얻는 사람들은 윤동주와 같이 세상과 나 사이의 차이를 사랑과 긍휼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인용되어서 유명해진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의 발문의 내용에도 이 긍휼감이 차이가 어떻게 죽어 있는 사물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사랑과 긍휼의 감정으로 상대를 반복적으로 보고 대할 때 상대는 다른 것과 똑 같은 물건이 아니라 독특한 차이를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새롭게 태어난 상대는 이전 상대가 아니라 나와의 차이가 더 강조되고 부각된 새 생명을 획득한 상대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은 책이 바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자신 집단만을 부각해서 동질적으로 구성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동질성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진보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보수가 전제되어야 하고 보수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곁에 진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함에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못 본척하고 있다. 또한 차이를 본 보수나 진보의 사람들도 상대와의 관계를 인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상대를 부정하기 위한 적대적 관계로 상대를 설정한다. 상대를 발견한 진보와 보수도 자신은 못본척한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본적 긍휼감이 전혀 없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경쟁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긍휼감과 사랑의 감정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강한 존재의 동질성을 모방하도록 가르친다. 상대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또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 또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상대와의 차이에 대한 반복을 통해서 보게된 더 큰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비전이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이 살던 과거의 동굴에서 본 세상만을 비전이라고 주장한다. 제대로된 비전은 항상 과거와 미래가 서로 교류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비전을 잃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본 것들만 비전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상대를 자신의 비전으로 제압하려는 제국주의적 생각에 경도된다.

비전을 잃고 차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잉태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폭력이다. 대한민국이 이런 갈등의 회오리에 휩싸인 것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무릅을 꿇려야 한다는 동질성에 대한 헤게모니 싸움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각에도 대한민국은 차이의 갈림길에 서 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이미지: 사람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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