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2-20 13:50
[N.Learning] 이해가 사라졌다 꼰대사회 #꼰대 #어른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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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사라졌다
꼰대사회
꼰대와 어른의 문제는 물리적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같다. 나이가 많은 꼰대도 있지만 나이 어린 꼰대도 있다.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강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알게 모르게 꼰대의 대열에 합류한다.
어른과 꼰대의 문제는 가르치는 내용이 아닌 가르치는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영어에 이해는 Under-Stand이다. 이해는 자신이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방식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진정한 이해는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 시키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얻어진다.
이해의 주체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올려다보는 이해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상대를 억지로 낮춰 놓고 자신을 올려보도록 강요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다. 가르치는 내용이 같다고 해도 전자에서 파생된 이해는 어른의 가르침으로 귀결되지만 후자에서 보인 이해시킴은 꼰대질이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은 위치에 놓고 상대를 올려다보며 하는 이해도 완전한 이해는 아니다. 이것이 완전한 이해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가르침이 내 삶의 씨줄과 결합해서 새로운 직조(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고 이 새로운 태피스트리의 입장에서 새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지평을 마련했을 때 만들어진다. 이런 새로운 지평으로 나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스승과 적어도 같은 수준과 지평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고차원의 이해이다.
가다머라는 독일의 해석학자는 이런 이해의 개념을 한층 더 밀고 나가서 이런 새로운 직조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이 직조대로 실천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든다면 가장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한다고 규정한다. 가다머의 실천적 이해는 진성리더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과 일치한다.
역설적으로 학교의 교탁, 교회의 강대상, 법관들이 앉아 있는 법대는 전 근대적 꼰대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더 높게 만든 교탁, 강대상, 법대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가르침을 전수하시는 직업은 어른이기보다는 꼰대로 전락할 개연성이 특히 높다. 이해의 상대가 부여한 단상이 아닌 전근대 사회가 전수한 놓은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직업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자신이 높임을 받고 대신 상대를 낮출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정당화 하는 자리의 선생님, 종교인, 판사가 아닌 사람들도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꼰대질에 속수무책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은 디지털 세상으로 급격하게 편입되면서 젊은 꼰대가 급증했다. 젊은이들이 요즈음 디지털 세상을 업데이트하지 못한 어른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 부분 무관심이거나 젊은 꼰대질로 인식될 개연성이 높다. 물론 젊은이들의 알고 있는 내용이 디지털 세상의 맥락에 더 맞지만 아날로그 세상 속에서 살아온 어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맥락을 송두리째 무시하거나 억지로 지워버리고 어린이 취급해가며 자신의 디지털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려고 시도한다면 젊은 꼰대질이다. 젊은 꼰대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지어는 역맨토링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요즈음 최근 지하철이나 음식점에서 마스크를 안 쓴 사람에게 마스크를 쓰도록 강요하는 상황에서 필요 없는 논쟁과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따지고 보면 꼰대질의 변형이다. 꼰대질은 내용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상대의 맥락의 공간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이다. 요즈음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써야만 되는 상황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상황을 알고 있는 어른에게 누군가가 나서서 일방적으로 "마스크 쓰세요"라고 한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린이 취급을 당한 것 즉 꼰대질을 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신 상대를 어른으로 존중해가며 "마스크를 안 쓰셨네요?"라고 물어본다면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이야기 했을 때보다 더 나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 어른이 마스크를 못 쓰게 된 이유가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같이 나설 수도 있다.
꼰대질은 나이의 문제를 떠나 자신이 아는 합리적 지식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교만이 발동될 때 생기는 삶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억누르지 못한 지식의 교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말의 뉴앙스가 바뀌어서 꼰대질을 일으킨다. 젊은 꼰대질로 어른들이 디지털 세상에 대해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게 만들거나 상대가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안 쓰고 싶다는 생각을 촉발했다면 실천까지 이어져야 완성되는 가다머의 진정한 "이해의 장면"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진짜 스승은 학생을 가르쳐야 할 어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스승은 학생이 궁극적으로 자신보다 더 높은 지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지식을 강요하는 세상이 아닌 상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상대를 같은 수준으로 레벨링하는 것을 돕는 사회가 더 성숙한 시민사회일 것이다. 말로 하는 강요라도 강요를 일상적으로 유통하는 <꼰대사회>라면 이 사회는 마스크를 안 쓴 사람들에게 매질하고 집단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개발도상국들과 큰 차이가 없다. 꼰대사회는 탈 시민사회의 한 변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