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8-19 13:39
[N.Learning] 차이의 발견과 차이를 넘어서기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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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발견과 차이를 넘어서기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차이(difference)에는 기득권을 지키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차이와 미래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차이라는 말을 연상할 때 미래의 변화를 만드는 차이보다는 기득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차이의 다른 말인 차별을 더 많이 연상한다.
전자는 차이를 리스크로 보는 견해이고 후자는 차이를 기회로 보는 입장이다. 전자가 규정하는 차이를 더 신봉하는 사람들은 불리한 상대방이 자신을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을 더 높게 세우는 전략에 몰입하지만 후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벽을 허물어 서로가 같이 협업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든다.
세상의 모든 차이는 구별에서 시작된다. 여성과 남성, 하늘과 땅, 어른과 아이는 그냥 대상을 잘 이해하기 위한 구별에서 시작되었다. 이 구별에다가 가치를 부여한 것이 차별이다. 구별은 서로 간에 공간을 확인하는 긍정적 작업이지만 차별은 이 공간에 서로가 소통할 수 없도록 벽을 세우는 부정적 행동이다. 여성보다는 남성, 땅보다는 하늘, 아이보다는 어른이 더 가치가 있다고 규정하고 이 규정을 남성이 여성에게, 하늘이 땅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받아 들이도록 강요한다면 차이는 차별이 된다. 차별은 유리한 범주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관심이 권력행동으로 발현된 것이다. 차별의 주체는 대개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범주 차이를 넘어서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본 차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면 어제와 미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실제로 실현되면 변화가 생긴다. 이 변화의 추동력을 만들기 위해 미래를 상상하게 하고 이 상상과 현실을 대비시켜 차이를 극명하게 만든다. 소위 시간적 차이를 기반으로 미래에 대해 상상적 체험을 만들어낸 것이 비전이다. 시간적 차이를 추동하는 비전이 없다면 새로운 변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에서도 차별화 전략이란 이름으로 이런 미래를 위한 차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는다.
인류의 지금까지의 진화를 이끌어온 힘이 가능했던 것은 변화를 추동하는 차이가 기득권 질서를 주장하는 차이를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기의 원리가 그것이다. 기득권 질서를 주장하는 차이는 뒷다리이고, 변화를 주장하는 차이는 앞다리이다. 앞다리가 아무리 앞서서 나가려해도 뒷다리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달리기는 커녕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문제에 대입해보자. 여성과 남성을 그냥 범주적으로 나누는 것은 구별이다. 이 구별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늘과 땅의 구별이 있는데 이 말을 없애자는 주장과 같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자에 1을 부여하고 여성에 2를 부여하고 1이 2보다 낫다고 주장할 때 생긴다. 반대로 2가 1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 간 성차별의 대치국면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남성들이나 여성리더가 나서서 미래의 차이를 비전으로 제시해도 이 비전이 실현될 개연성은 낮다. 한쪽이 정치적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들을 결집해서 상대가 주장하는 미래에 뒷다리 세력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사회범주적 차별이 해소되어 극복되지 못한다면 서로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일에 파트너로 나서지 않는다. 미래는 물건너가게 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MZ세대와 X세대, 학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정상인과 장애인 등, 모든 사회적 범주에 해당된다. 이들 사이의 차별이 해체되고 이 해체를 통해 서로가 접속되고 연결되어 협업의 운동장을 만들어내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일은 공염불에 가깝다. 선진국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화두가 된 배경이다.
김제에 가면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금산교회(1905년 설립)가 있다.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은 조선의 서남부 선교를 맡은 테이트(L.B Tate) 선교사다. 선교를 위해 김제를 여행하는 중 그당시 거상이자 지주였던 조덕삼(1867-1919) 집에서 하루를 신세진다. 이때 조덕삼은 왜 잘 사는 나라의 사람이 이렇게 외진 곳에까지 와서 고생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당연히 테이트는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했고 감화를 받은 조덕삼은 예수를 영접한다. 자신의 사랑채를 교회공간으로 내어주고 세례를 받고 선교를 돕는다. 그당시 조덕삼 집에는 조덕삼보다 15살이 어린 이자익이 머슴으로 일한다. 머리가 명석했던 이자익도 예수를 영접하여 금산교회를 같이 섬긴다.
교회사에 길이 남을 시대적 각성사건은 금산교회 장로선출에서 발생했다. 교인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주인이자 교회의 설립자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다. 예상치 못한 선거결과에 안절부절 못하던 당시 교인들에게 조덕삼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 한다. "우리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을 제대로 알아보는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도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이 둘은 집에서는 주인과 종,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 사회적으로는 어른과 청년으로 선교를 위해 서로 협업했다. 뿐만 아니라 조덕삼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목사 안수를 받게하고 안수를 받자마자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한다.
이자익 목사는 시골교회 목사이면서 한국교회 총회장을 3회 연임했다. 이자익 목사가 서거한 이후에도 한국교회에 분란이 생기면 이자익 목사께서는 어떻게 해결하셨을까를 질문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다. 한국교회 새 지평을 마련하는 역사가 테이트 선교사, 조덕삼 장로, 이자익 목사, 그당시 금산교회 평신도들에 의해서 열린 것이다.
금산교회 이야기는 나이와 신분이라는 사회적 범주가 서로 접속되고 연결되어 협업의 태피스트리(공간)가 만들어 질 때 미래를 위한 차이를 만드는 기적이 따라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적 범주차이가 극복된 새로운 협업공간이 생기면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미래를 위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 몰입한다. 세상의 모든 의미 있는 변화는 구성원이 모두 주인의식으로 몰입함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금산교회 이야기는 사회적 범주 차이를 놓고 상대를 적과 경쟁자로 규정한 싸움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 미래의 차이를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가 배워야 할 오래된 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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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금산교회는 그 당시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 규범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서로 같이 합석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볼 수 있었을까? 해법은 커튼이었다. 커튼을 쳐서 남성과 여성은 목회자만 볼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남녀문제는 커튼은 사라졌지만 대신 이 자리에 투명 성벽이 세워진 느낌이다. 이 투명 성벽을 부수고 운동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래도 늦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