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9-26 10:40
[N.Learning] 매운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 한국인 신바람의 정체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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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축복이 되다
매운 맛의 정체
한국 사람처럼 매운 맛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한국인은 떡볶이, 매운 라면, 매운 짬뽕, 불닭복음면 등 외국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매운 음식을 입에 달고 산다. 일반적으로 음식과 반찬의 색도 고추가 많이 들어가서 붉은 계통이다.
매운 맛은 맛이라기보다는 매운 것에 들어있는 캡사이신이라는 화학성분이 만들어내는 통증에 가깝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통각을 자극하고 이 통각은 뇌에서 진통제에 해당하는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매운맛을 영어로 표현할 때도 Spicy(찌르는 통증)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인들은 매운 맛을 온도를 뜻하는 hot이라고 잘못 번역하기도 한다. 아마도 매운 맛은 통증과 더불어 열을 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음식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외국인은 hot이 spicy hot인지 그냥 뜨겁기만한 hot인지를 되묻는다.
매운 맛에 중독을 느끼는 것은 매운맛 자체가 아니라 매운 맛이 만들어낸 통증을 해결해주는 진통제인 엔도르핀 때문이다. 또한 우리 몸은 매운 맛으로 달궈진 온도를 식히기 위해 땀을 분비한다. 엔도르핀과 더불어 땀이 분비되는 개운한 쾌감도 매운 맛을 좋아하는 이유다.
통증을 해결할 때 나오는 엔드르핀인 매운 맛과 가장 가까운 정서는 열정(Passion)이다. 열정의 어원도 고통이다. 매운 맛과 비슷하게 열정이란 고통이 해결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을 의미한다. 고통의 해결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닌 정서는 쾌락이다. 마약이 위험한 이유는 열정을 죽여가며 고통없는 쾌락에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결과만 중시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열정을 고통없이 얻어지는 쾌락으로 오해하고 무작정 열정이 부족하니 열정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열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리더들은 우리에게 마약을 강요하는 것에 준하는 강요를 퍼붓는다. 열정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때 느끼는 희열이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대로 뜬금없이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은 자신이 고통스럽게 해결해야 할 자기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생긴다. 남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강요한다고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신바람이라는 문화를 가진 것도 매운 맛을 좋아하는 성향이 집단적으로 발현한 것일 수 있다. 신바람의 원천은 매운 맛에 해당하는 집단적 통증에 대한 집단적 해결이다. 집단적 고통을 집단적으로 해결할 때 집단적 희열을 느낀다. 이 집단적 희열은 바람처럼 전염성이 탁월해서 흔히 신"바람"이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집단수준에서 공유된 열정(passion)이 신바람이다.
한국인들에게는 냄비근성이 있다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집단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서 얻어낸 신바람이 문제가 해결되면 불타올랐던 열정도 같이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신바람을 집단적 에너지로 살려내면서 이 에너지가 냄비처럼 쉽게 식지 않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건과 같이 느끼고 쉽게 사라지는 감정적 정서와 더 오랜 시간 지속되는 윤리적 정서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면 답이 보인다.
감정적 정서인 희노애락애오욕 (喜怒哀樂愛惡慾) :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은 어떤 사건이 우리 몸을 자극할 때 뇌에서 관련 호르몬이 분비되어 생긴다. 감정에 관련된 호르몬은 통상 우리 몸 속에 짧은 순간 강하게 유지되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칠정의 감정에 신성한 사명과 목적이 이입되면 사단과 같은 고차원의 지속가능한 호르몬 에너지인 윤리적 정서(Moral Sentiment)가 된다.
성리학에서는 윤리적 정서로 측은지심(惻隱之心; compassion), 시비지심(是非之心; righteousness), 사양지심(辭讓之心; humility or modesty or gratitude), 수오지심(羞惡之心; guilt or shame)을 제시한다. 흔히 사단이라고 부른다. 윤리적 정서에는 사단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을 예로 들면 사단이라는 윤리적 정서는 사건에 의해서 촉발된 짧지만 강한 느낌인 일반적 감정에 인의예지라는 사명과 목적이 가미되어 고차원의 지속가능한 정서로 전환된 것이다. 측은지심(compassion)은 정욕적 사랑에 인이, 시비지심(righteousness)은 분노에 의가, 사양지심(humility or modesty)은 욕심에 예가, 수오지심(shame)은 미움(blame)에 지(지혜)의 사명과 목적이 접목되어 만들어진다. 존재목적이 유지되는 한 윤리적 정서도 유지된다.
마찬가지 원리다. 순간적으로 우리 몸을 강하게 장악하는 감정인 신바람인 열정(Passion)이 삶의 존재목적과 접속되면 더 오래 지속되는 윤리적 정서로 전환된다. 신바람은 존재목적과 접속될 때 고양된 마음(Elevation), 긍휼감(compassion), 공의로움(righteousness), 감사(gratitude or gracefulness), 자부심(pride)와 같은 다양한 윤리적 정서를 생성한다. 우리 민족의 고통에 대한 또 다른 정서인 슬픔(sorrow) 즉 한이 우리의 존재목적과 접목되었을 때 한풀이를 통한 공동체 의식도 만들고 한을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집단적 창의성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한(sorrow)이 존재목적과 만나지 못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목격하는 것처럼 집단적 갈등과 내노남불의 난장판으로 만든다.
신바람과 한이 윤리적 정서처럼 지속가능한 생산적 정서로 전환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언제부터인가 존재목적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시급한 문제해결을 위해 열정이 발화되어도 존재목적의 부재가 이들 발화를 지속가능한 정서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냄비근성을 보였던 사태는 대부분 고통이 생존과 생계의 수준에서 해결되는 것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냄비근성은 우리 민족이 미래를 위한 존재목적을 잃고 살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심지어 간디는 존재목적을 잃었을 때 정치에서는 원칙이 사라지고, 부자들에게 땀흘리는 일이 사라지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양심이 사라지고, 교육에서는 품성이, 상거래는 도덕이, 과학자들에게는 인간이 사라져 7대악 속에서 헤맨다고 경고한다.
아무리 어려운(매운) 일을 당해도 이 일이 목적하는 바가 크고 신성하면 이 목적이 실현될 때까지는 이 고통스러운 일을 해가면서도 즐거움과 열정과 희열을 지속적으로 느낀다. 심지어 존재목적을 잃은 사람들에게 핍박 당하는 것조차도 지극한 희열이 된다.
우리 부모들도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통에서 장사해야 하는 고통을 지식들을 공부시켜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승화시켜 매일 꺼지는 열정의 불씨를 살려냈다. 자식들이 성공할 때까지 부모들에게는 새벽에 일어나 장사하는 고통이 열정이었다.
가족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가 당하던 정치적 고통을 인지하고 촛불로 살려내 광화문에서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서 지금의 거대야당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의 새정권이나 거대야당은 미래를 살려내지 못하고 집단적 고통만 주는 정치세력으로 변질되었지만 지금과 같은 집단적 고통이 지속되면 국가의 존재목적에 대해 각성한 민초들이 이들을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소환할 것이다.
BTS가 이끄는 한류가 글로벌 신바람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전하는 존재이유에 대한 메시지가 그간 고통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집단으로 떼춤을 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칼군무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들의 가사 속에 담긴 목적에 대한 메시지가 춤에 접목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BTS가 될 수 없었다.
존재목적에 대한 지향성이 분명한 사람들은 냄비가 되고 싶어도 될 방법이 없다. 타오르던 열정이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의 삶을 살고 있었다면 존재목적을 잃은 것이다. 존재목적과 접목되는 한 고통은 자신을 열정으로 단련시켜 온전하게 성장시키는 축복이다.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 물어보자.
최근 매운 맛에 끌리는가?
예라고 답한다면 자신에게 열정이 고갈되어 있음에 대해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