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legacy)을 남겨준다는 말을 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재산을 남겨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재산으로 남겨주는 유산도 의미가 있지만 이 돈으로 환산된 유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겨준 사람의 의도가 소멸된다. 아무리 큰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었어도 이 돈을 남겨준 사람의 삶의 스토리가 그 유산 속에 담겨 있지 못한다면 복권을 당첨해서 얻은 10억과 같은 돈일 뿐이다. 설사 탕진해도 유산을 남겨준 사람에게 큰 마음의 빚이 없다. 운좋게 유산을 받은 사람은 돈많은 부모를 모시는 유전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일 뿐이다.

진짜 유산(legacy)은 남겨준 사람의 소중한 삶에 대한 기억이다. 이 유산의 가격은 이 기억 때문에 이 유산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해지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제대로된 유산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남겨지는 것일까?

사르트르는 이런 유산은 삶의 목적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사르트로가 제시한 명제는 <인간에게는 존재가 목적에 앞선다>이다.

물건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목적이 결정된 상태로 태어난다. 의자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목수가 의자의 목적을 계획하고 이 목적에 따라 의자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사물과는 반대다.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던져질 때 어떤 사람도 자신이 태어난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냥 목적이 없는 존재로 세상에 던져졌다.

인생살이가 허허로운 이유는 존재의 배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존재의 빈배를 타고 죽음을 향해서 항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항해를 통해서 자신이 왜 항해하고 있는지 이유를 깨달는다. 왜 사는지 이유를 깨달고 자신의 배에 사는 이유들에 해당하는 목적과 본질을 건져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달지 못하고 그냥 빈배로 죽음을 맞는다. 말그대로 남들처럼 열심히는 살았지만 존재의 허허로운 배를 몰고 죽음 직전까지 항해한 것이다.

운명은 죽음과 직면해서 결정된다. 죽음은 우리가 존재라고 규정해왔던 모든 것을 이승에 놓고 떠나라고 명한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존재로 규정해왔던 돈 명예 권력 육신 등 모든 것을 세상에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 죽음저편에 있는 미래에 넘겨줄 수 있는 것은 내 이름을 걸고 실현시킨 목적 뿐이다. 내가 이승에서 실현시킨 목적은 메모리으로 전환되어 죽음 이후에 다른 사람들의 삶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채택될 때 비로서 유산(Legacy)이 된다.

죽는 순간 미래에 넘겨줄 수 있는 삶의 메모리가 없다는 것이 판정되면 나는 존재가 소멸되며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소멸된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내 이름조차도 텅 빈 것이라면 결국 이름조차도 기억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만든 삶의 본질인 목적에 관한 실현된 메모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미래의 후세들에게 채택되어 이들이 삶이 메모리로 재구성된다. 후세의 삶의 메모리로 재구성되는 순간 나의 유산은 다시 이들의 삶 속에서 미래로 부활한다.

유산(legacy)이란 나의 이름으로 실현된 목적을 의미한다. 실현되지 못한 목적은 그냥 열망하는 목적의 상태이지 유산(Legacy)를 구성하지 못한다. 유산을 통해서만 나는 온전하게 죽은 이후에도 영생을 획득한다. 유산은 나의 사후에도 누군가의 삶의 플롯으로 채택되어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나의 부활을 만들어준다. 우리가 지금도 이처럼 풍성한 삶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빛나는 유산을 남겨주었고 이것을 우리 삶의 플롯으로 채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퇴임을 앞둔 임원들과 회사에 남겨줄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많은 임원분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을 환산하며 회사는 죽어도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퇴직 후 자신의 유산의 크기를 돈으로 계산한다. 이분들을 정년퇴임 후 다시 만나게 되면 실제로 정년 퇴임한 후 회사가 이분들이 남긴 유산을 기억하고 이분들을 점심이나 회사의 중요한 행사에 초대했는지 물어보면 이분들은 답변을 회피한다. 본인이 유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산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회사에 유산을 남겨준 임원들은 성과도 냈을 뿐 아니라 이 성과를 통해 자신급에 해당하는 리더를 많이 길러낸 분들이다. 이분들이 육성한 리더들이 회사에 남아 있는 한 이 임원의 삶의 이야기는 리더들의 삶의 플롯을 구성해서 살아남아 있다. 자신이 리더로 키워낸 사람들이 회사에 남아 있는 한 이들은 자신을 키워준 임원을 회사의 공식 비공식 파티에 초대해 고마움을 표한다.

이런 임원보다 회사에 더 큰 유산을 남겨주는 임원들도 있다. 이들은 성과를 남기고 이 성과를 통해 많은 리더를 길러냈을 뿐 아니라 이 리더분들에게 회사의 사명과 철학을 공유하게 해서 회사의 문화를 바꾼 분들이다. 회사는 이 임원이 회사에 다녀갔기 때문에 회사가 일하기 좋은 회사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다고 칭송한다. 이런 문화를 남겨준 임원이 아마도 최고의 유산(Legacy)를 남겨준 임원일 것이다. 이 임원은 설사 회사에서 퇴사를 해도 회사가 살아 있는 한 회사는 이 분을 기억한다.

어떤 세미나에서 퇴임 후 회사의 자문역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임원분의 말이 생각났다. 개인적 사정이 있어서 고위임원으로 정년 퇴임을 했는데도 회사는 이분을 붙들어 놓고 안 놔준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마음을 다잡고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다시 일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회사는 이분의 레거시 혜택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정년퇴임했어도 이 분을 정년퇴임 시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진성리더의 삶을 염원하는 임원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내용이다. 성과, 인재육성, 문화를 만드는 일은 세 가지 다른 일이 아니다. 같은 시간의 일을 통해 성과도 내고, 리더도 길러내고, 문화도 만들 수 있는 사람들만이 회사에 유산의 족적을 남기는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성과, 사람을 넘어서 문화를 남길 수 있는 임원만이 진성리더급 임원이다. 이들이 남긴 문화만이 조직의 기억을 장악해서 이들이 회사를 다녀간 이유를 명증적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