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1-07 20:51
[N.Learning] 공감의 리더십이 아니라 환대의 리더십을 행하라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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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리더십에서 환대 리더십으로
Hospitality Leadership
시대는 공감 리더십(Empathy Leadership)에서 환대 리더십(Hospitality Leadership)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공감(Empathy)은 상대가 가진 아픔이나 기쁨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지적을 들어왔다. 설사 공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공감이 이끄는 행동은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위로(sympathy) 정도이다.
상대의 정서적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원활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기본이기는 하지만 공감은 이기적 목적이나 상업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된다. 자신의 의견을 부하에게 개진시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리더들도 이전에는 그냥 직책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그런 리더십을 행사한다면 갑질이다. 따라서 최소한 공감을 통해 상대의 정서 상태를 파악한 후 상대의 정서에 맞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부하가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하가 리더의 결정을 실행하는 것은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대상에 대한 공감이 요구되지만 리더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의뢰받은 물건과 서비스를 고객의 마음 속에 심어야 하는 광고회사가 이용하는 곳은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공감이라는 설탕코팅을 통해서다. 고객이 광고회사의 스토리로 설탕 코팅된 제품을 샀다고 해서 이 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지불된 과대한 광고비용은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개선하는데 들어갔어야 할 비용이다. 고객은 설탕코팅된 제품을 비싸게 사는 꼴이다.
한 마디로 공감능력이 있다고 해서 위로를 넘어 고통의 문제를 원인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상업적이나 이기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된다.
경기가 좋을 때는 공감능력만 있어도 최소한 소통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설정한 목표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가 꺽기고 여기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 구더기가 생겼고 이 구더기가 무서워 누군가가 거적을 덮어논 상태다. 고통의 상처에 구더기가 파고들기 시작해서 고통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고통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원인의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공감리더십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리더십이 환대 리더십이다.
환대(Hospitality)란 이런 공감(Empathy)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되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는데는 도움을 주고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나 상대를 주인이자 리더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인이자 리더로 만드는 것은 환대의 리더십이다.
환대의 첫 단계는 자신에 대한 아픔을 자기긍휼로 환대하고 이 아픈 자신을 치유해서 주인으로 키워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환대의 시작인 자신에 대한 환대는 내적 환대다. 부모가 자신의 혈연이나 자식을 긍휼로 환대하는 것도 내적 환대다.
환대 리더십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런 내적 환대를 넘어 타인에 대한 외적 환대로 환대를 확장할 수 있을 때 발현된다. 대부분의 경우 내적 환대의 경험은 외적 환대로 확장되어진다.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제대로 치유하여 다윗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자신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서 아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해 이들도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신 삶을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외적 환대다. 내적 환대가 외적환대로 확장될 때 리더는 환대 리더가 된다
적어도 환대 리더십을 행사하는 리더는 일대일로 만나서 이들을 환대하는 삶을 넘어서 조직구성원 전체를 환대하거나 팀원 전체를 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구성원 전체를 환대하거나 팀원 전체를 환대하는 환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환대의 대상에 해당되는 사람들과 지금은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람들의 범주를 구획하는 자신만의 울타리에 기준이 있어야 한다.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을 조건없이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는 없다. 리더는 조건적 환대의 기준으로 자신만의 울타리를 가지고 환대하고 환대의 역량이 확장되면 울타리를 절대적 환대가 가능한 쪽으로 넓혀간다.
이 울타리는 자신이 약속한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울타리이기 때문 가치와 사명의 울타리라고 부른다. 이 울타리의 기준에 포함된 사람들은 혈연, 학연, 지연 등과 상관없이 모두 소중한 가족으로 취급된다. 혈연으로 엮어 있어도 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환대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사명의 울타리는 구성원들에게 따뜻한 심리적 안정지대를 제공해준다. 심리적 안정지대는 추위에서 떨고 있는 밖에 비해서 따뜻한 온기를 제공해준다. 심리적 안정지대는 울타리에 초대된 사람들이 공동으로 덮을 수 있는 따뜻한 이불이거나 난로다. 환대리더는 심리적 안정지대가 제공한 온기로 기운을 차린 구성원들이 서로를 환대해가며 치유를 도와 줄 수 있는 운동장을 설계해준다. 이 운동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과 삶에서 온전한 주인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는 전문가의 놀이터이다.
MS의 나델라의 리더십을 공감의 리더십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나델라가 실천하는 리더십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긍휼감에 기반한 환대리더십이다.
나델라는 자신 가족에 아픈 환자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치유하는 내적 환대를 경험했고, 이 경험을 직원들과 고객들에게 돌려 외적 환대를 완성했다. 내적 환대가 외적 환대로 확장되자 MS에 심리적 안정감의 울타리가 생겨 에너지 레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MS는 모든 구성원이 주인으로 뛰는 일터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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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Love
딥 러브
사랑이라는 이름만큼 세속화된 용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이 자본주의와 만나서 고도로 상품화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무엇일까? 자신이 유전자 복권으로 물려받은 잘난 점만을 골라서 사랑하는 사랑도 있을 수 있고 아픈 자신까지 자신으로 받아들여가며 사랑하는 사랑도 있다. 온전한 사랑은 아픈 자신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긍휼(Compassion)에 기반한 사랑을 뜻한다. 자신의 잘난 점에 대한 사랑은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는 자신에 대한 잘못된 편애로 이어진다. 자신의 잘난 점만을 편애하는 사랑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눈이 삶의 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긍휼의 사랑이 전제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온전한 Deep Love이다. 긍휼의 사랑은 모든 종교의 기반이되는 사랑이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compassion을 긍휼로 번역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로, 유학에서는 측은지심으로 번역한다.
자신의 아픔조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긍휼의 사랑은 자신의 성인아이를 일으켜 세워 다윗으로 키워내는 힘이다. 자신의 성인아이를 긍휼로 사랑해 다윗으로 키워내지 못하는 사람이 큰 직책을 맡는다고 해서 모두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더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자신감은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이 아픔을 해결해 다윗으로 키워내는 상처받을 용기(Vulnerability)에서 파생된다. 상처받을 용기는 긍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자신을 긍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자신에 대한 딥러브를 회복하고 자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인 자긍심을 길러낸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자긍심이 있는 사람만 어려운 있어도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고 훈련시켜 자기효능감의 근력을 만든다. 결국 자신에 대한 긍휼의 사랑이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근원적 자신감인 자기효능감을 만들어낸다. 자기효능감의 근력이 있는 사람들만 초뷰카시대가 요구하는 문제해결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긍휼의 온전한 사랑 속에 자란 모든 것들이 진리의 씨앗이다. 긍휼 속에서 자란 지식은 지혜가되고, 공정은 공의가 되고, 재능은 은사가 된다. 긍휼의 자궁 속에서 자란 각종 희노애락애오욕은 고양, 감사, 자부심, 은혜라는 윤리적 정서로 키워진다.
신자유주의가 기업에 침투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강점과 역량만을 요구하고 이것을 이용하는 과정에 집중하는 동안 기업은 딥러브가 가지는 철학과 관점을 잃었다. 경기가 어려워지자 그나마 있던 공감도 포기하고 이미 상처받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토사구팽시키거나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성한 사람들을 다시 전쟁터로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기업이나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지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더 늘어난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이 고통을 오랫동안 지니고 있다면 상처로 변한다.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고 구더기가 무서워 누군가가 거적을 덮어 씌워 놓았지만 그렇다고 상처와 구더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HR도 관점을 전환해야할 시점이다.
인간을 인적 자원 Human Resource이라고 명칭하고 물건처럼 쓸만한 것만을 취하고 쓸모 없으면 버리는 관점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재앙은 불보듯 뻔한 일이 된다. 구성원이 안심하고 자신들의 상처를 같이 치유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만이 변화가 쓰나미로 몰려오는 초뷰카시대에도 지속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 긍휼을 통한 환대의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만이 성인아이로 변모한 회사를 다윗으로 일으켜 세워 지금과 같은 어려운 경기에서 회사와 구성원이 같이 협업해 주인으로 성장하는 유기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
초뷰카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 있는 있는 공의기업(Company of Shared Purpose)에서 회사와 구성원의 관점은 서로를 긍휼로 환대해 서로를 진정한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다. 공의기업에서는 구성원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회사의 플랫폼을 이용해 구성원 스스로가 자신을 주인으로 세울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