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4-03 16:31
[N.Learning]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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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
주체의 부활
한국에서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현대의 항공기술 수준을 볼 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사고가 날 확율은 거의 없다. 비행기를 타야 미국에 제시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의 객관적 믿음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 비행기를 탈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삼인칭 믿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관적 일인칭 믿음이 나의 행동을 좌우한다. 나 자신은 비행기에 대한 드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고소공포증도 있고, 공황장애 증세도 있을 경우 다른 모든 사람은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어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게 미국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일인칭 주관적 믿음이 없다.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이 충돌한다면 미국에 가고 싶은 열망이 아무리 커도 이 열망을 실현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 믿음이 강해 이것이 단단한 현실로 다가온다 해도 이런 현실에 대한 나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없다면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삼인칭 믿음은 인지적 믿음인 반면, 일인칭 믿음은 내 몸을 움직여 진실을 행동으로 입증하게 만드는 신조다. 지행격차는 삼인칭 믿음은 충만하더라도 정작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이 부재할 때 생긴다. 내가 주인이자 주체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될 때이다. 삼인칭 믿음은 과거와 현재 눈에 목격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지만 일인칭 믿음을 나를 통해 미래가 증거될 것이라는 미래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다.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은 토양과 씨앗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두 믿음은 우리 삶에서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토양에 관한 믿음인 삼인칭 믿음은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를 제공해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하지만 아무리 큰 운신의 폭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인칭 믿음은 이런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 안에서 나를 진실의 증거이자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씨앗에 대한 믿음이다. 삼인칭 믿음은 건강한 삶의 울타리이자 필요조건이지만, 일인칭 믿음은 이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를 만들고 이 무늬를 통해 자신을 진실의 증거로 세우는 행동의 유무를 결정한다. 객관적 현실을 알지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의 결여는 삼인칭 믿음에 비해 일인칭 믿음이 없을 때이다. 토양만 있고 살아 있는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씨앗은 없는 경우다.
동양에서 삼인칭 믿음을 넘어 일인칭 믿음의 중요성을 가장 잘 제시한 학자는 장자다. 이 장자의 일인칭 믿음을 통한 주임됨의 철학을 가장 잘 계승해서 실천한 분이 당나라의 임재선사이다. 임재선사는 일인칭 믿음에 기반한 주인의 삶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되어 살면 거기서 하는 모든 일이 진실로 서게 된다." 임재선사는 진실은 찾아가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주인으로 세울 때 자신의 몸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인된 삶을 살기위해서 남의 써준 삼인칭의 삶을 넘어서서 일인칭 주인공의 삶에 대한 믿음을 복원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일인칭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주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각성하고 스스로가 작가가 되어 자신 삶의 대본을 직접 쓴다. 일인칭 주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진리는 깨달을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자기 삶의 진실은 깨닫지 못한다. 삼인칭 믿음이 인지적 믿음이라면 일인칭 믿음은 믿음의 씨앗이 자신의 몸이라는 토양을 뚫고 자신을 통해 발현될 때만 진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류의 진보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 일인칭 믿음을 실현시킨 사람들이 주도해왔다. 일인칭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진실이란 발견한 목적을 자신을 통해 현실에서 실현시킨 결과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일인칭 믿음이 이끄는 주체적 삶을 복원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복음의 말씀이 단순히 삼인칭 믿음에 멈춰있다면 원칙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깐깐한 교장선생님과 같은 유연성이 없는 성경주의자, 교회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된다. 기독교인에게 일인칭 믿음이란 이 복음을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자신을 통해 복음이 새롭게 증거되는 부활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근력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병환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가며 이런 기적은 너희들이 믿고 있듯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이 너를 통해 증거가 되는 너 자신에 대한 일인칭 믿음 때문에 스스로 일어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의 씨앗이 우리의 몸의 토양에 발아되어 나무로 탄생하여 결실을 만든 사건을 진실의 사건으로 생각했다. 예수는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으로 전환되었을 때 기적(근원적 변화)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가 전한 삼인칭 복음이 우리 삶에서 일신우일신 일인칭으로 부활되는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때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종교로 정초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족이라는 믿음이다. 나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랑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에 제공한 울타리에 대한 믿음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밀어내 심리적 안정감을 선물한다. 모든 믿음의 시작은 "울타리"에 대한 삼인칭 믿음에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의 울타리를 제공해시고 응원해주시는 분이지 우리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시는 분은 아니다. 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전달된 사랑과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를 통해 자신을 복음의 증거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만든 울타리 안에 거하는 삼인칭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다. 이 이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내 몸의 씨앗으로 받아들여 열매를 길러낼 때 다시 하나님을 내 속에 거하게 만드는 일인칭 믿음이 실현된다. 자신 속에 하나님이 거하게 하는 일인칭 믿음을 실현시켜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세상을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각자 기독교인에게 부과한 책무다.
21세기 교회가 정체된 이유는 순종을 잘못 해석해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한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해 믿고 기도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일의 원인, 과정, 결과까지 모두 목적에 맞춰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목적론이 기복론을 탄생시켰다. 삼인칭 믿음은 한 달란트를 한 달란트로 갚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성도를 키웠다. 한 달란트는 하나님이 제공해준 은혜의 땅이자 종자돈이라면 이 땅에서 종잣돈으로 자신의 나무를 키워 다섯 달란트를 만들어내는 일인칭 믿음을 완성한 사람들이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진정한 크리스챤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은혜받았음을 외쳐가며 열매를 수도 없이 따먹고 향락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열매의 씨앗을 자신에게 심어서 남들을 위한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일인칭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산다. 삼인칭 믿음만 존재하는 교회는 생명이 자라지 않는 죽은 교회다.
김민기씨가 모 매체와 인터뷰하는 도중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계기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아침이슬을 작곡하다 막히면 다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막히면 아침이슬로 돌아가 곡을 완성해려해도 완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 집주위 무덤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계시를 받듯 <그>를 <나>로 바꾸게 되었고 그 순간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출이 지구의 몸을 통해 태양이 새롭게 탄생하는 사건인 것처럼 모든 새로운 탄생은 삼인칭 지구의 몸을 통해 일인칭 태양이 태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 탄생을 체험하는 주체는 항상 일인칭 자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침이슬의 <나>는 완성되기 전에는 <그>였던 것이다.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 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일인칭 믿음을 세울 수 있을 때 진실이 탄생한다는 것을 설파한 대표적 현대철학자는 베르그송과 바디우다. 베르그송도 진실이란 오직 자신이 어떤 본질적 상태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규정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주체적 체험만이 진실을 씨앗을 담는다고 설명한다. 바디우는 자신의 몸의 지평을 뚫고 진실의 씨앗이 자신을 통해 발아되는 것을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진실은 오직 자신의 몸을 통한 주체적 사건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에는 삼인칭 믿음이 넘쳐나지만 자신을 주체이자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은 점점 더 고갈되고 있다. 실제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대부분 역할들도 따지고 보면 다 삼인칭 문법이다. 부모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가 그랬어, 어떤 위인전에도 나와 있어, 유명한 자기계발서에 나와 있어 등등 내가 수행하는 역할 중 삼인칭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나는 삼인칭인 그가 써논 내 역할에 대한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문법이 <삼인칭> 믿음에서 <일인칭>인 나 혹은 우리의 믿음으로 전환되지 않는 다면 진정성 있는 주체적 삶은 가능하지 않다. 진정성은 내가 나의 삶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 이야기를 삼인칭에게 들려 줌으로 피드백과 지원을 받아서 실제로 나의 삶을 통해 내가 진실의 증거가 될 때 달성된다. 자아를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로 자아를 구분할 때 내적 자아는 스토리 작가이고 외적자아는 이 스토리의 대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러이다. 이 스토리텔러의 올바른 역할은 내재적 자아가 쓴 나의 스토리를 전파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지원을 이끌어내고 그들로 부터 들은 내 스토리의 미진한 점에 대한 피드백을 내재적 자아에게 전달해주는 에이전시인 것이다.
조직이 지향하는 가치는 있는데 이 가치를 통해 실현하려는 존재목적이 없을 경우도 삼인칭 믿음에 의해 장악된 마음씨 착하지만 이 조직을 통해 진실이 구현되어 돌파구가 마련되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치지향적 조직이어서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가치는 조직 구성원에게 심리적 안정지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하지만 이런 가치에 대한 삼인칭 믿음이 조직을 변화시키고 대체불가능한 조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공유된 가치에 대한 믿음은 삼인칭 믿음에 대한 필요조건을 구축한 것이지 구성원들이 주인으로 주체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이라는 충분조건을 실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조건은 이런 가치를 넘어 조직의 존재목적이 구성원에게 이입되어 구성원을 깨우고 일으켜 세울 때 실현된다. 공유가치가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지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 구성원이 조직의 목적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 목적을 실현시키는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일인칭 믿음을 작동시킬 때 조직은 대체불가능한 초일류조직이 된다.
조직에서 한 때 권한위양이니 임파워먼트 등의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임파워먼트의 본질에 대해 잘못 알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파워먼트는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권한을 구성원에게 넘겨주고 실제로 구성원이 스토리를 쓰고 이 스토리를 수행할 때에 완성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한을 넘겨주는 것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권한을 넘겨주었어도 자신의 스토리를 그 권한 범위에서 써가지 못하면 임파워먼트의 의도는 무산된다. 21세기 초뷰카시대의 새로운 임파워먼트는 구성원이 조직이 제공하는 공유가치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각성하고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인칭 대본을 써나가는 자기계몽(Enlightenment)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그의 쓰나미에 사로잡혀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동안에 나를 통해 실현되는 진실은 없다. 삼인칭 믿음은 아무리 강해도 토양에 불과한 믿음이다. 여기에 목적의 씨앗을 뿌려 살아 생장하는 일인칭 믿음을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주체와 주인으로서의 삶은 물건너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