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머리 속에 살고 있는 치와와 한 마리
공포와 두려움
우리 머리 속에는 편도체 (Amygdala) 혹은 치와와라고 이름 붙여진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치와와 편도체는 아몬드 모양으로 우리의 공포나 두려움 등의 감정을 조절하고 주변에 존재하는 해마와 협력해서 공포와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편도체는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진화시켜온 뇌이다. 또한 편도체는 동물의 뇌와 가장 가장 닮은 부분다. 인간은 원시시대 동물과 같은 수준의 약육강식의 시절을 살 때 동물처럼 자신보다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공포를 느끼고 달아나는 모드를 동원하고 자신보다 약한 대상이 나타나면 달려가서 포획해서 생존을 유지해왔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명생활을 통해 전전두엽을 발전시켜 이 공포를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다스려왔다. 인간은 편도체에 의해서 지배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는 달리 전전두엽을 발달시켜 공포를 제어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습득해왔다. 우리 두뇌의 전전두엽이 편도체와 협업을 하지 못해 편도체가 과도하게 일방적으로 활성화될 때 공황장애나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한다.
비유하자면 편도체는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치와와이고 전전두엽은 치와와가 사는 집이다.
전전두엽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하면 편도체인 치와와는 탈출해서 집밖을 헤매게 된다. 탈출한 치와와가 만나는 모든 대상들은 자신보다 큰 위협적인 개들이다. 치와와는 자신보다 큰 개를 만나면 큰 개들이 아무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있음에도 먼저 두려움에 떨어가며 짖어대고 자신이 먼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아무 생각 없이 주인과 산책하던 큰 개들도 치와와의 이런 공격태세에 놀라서 자신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치와와를 공격한다. 싸움의 결과는 너무 뻔하다. 가출한 치와와는 상처투성이 삶을 피할 수 없고 생존할 개연성도 점점 떨어진다.
우리 모두는 편도체라는 치와와를 가지고 있다. 이 치와와를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한다면 큰 개를 만나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 밖을 나올 수 없고 결국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두려움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와와인 편도체가 감지하는 두려움은 두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작은 상대적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큰 절대적 두려움이다.
작은 상대적 두려움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사사로운 두려움이다. 작은 두려움은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압력 때문에 생긴다. 변화의 압력에 직면해서 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벗어나서 사는 것을 상상해본다면 불현듯 찾아오는 두려움의 실체를 체험할 것이다. 상대적 두려움은 변화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일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 예상치 못한 험악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에 대한 상상적 두려움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변화의 요구를 외면해가면서 자신을 자신만의 삶의 방식인 치와와를 정신모형의 감옥에 가두고 자신이 후견인 노릇을 해가며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변화해서 집 안에만 머물 수 없는 세상으로 변화했다. 결국 변화가 상수가 되었고 변화는 치와와에게 직면해야 할 위협적인 큰 개이다. 결국 치와오아는 안전지대에서 나가야 하는데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난과 실패에 대한 상상을 감당하려니 두려움이 앞선다. 변화가 상수가 되었다는 주장에 따라서 감옥을 나왔을 때 겪게 되는 불확실성과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실패의 위험이 치와와에게는 큰 공포의 대상이다.
이처럼 치와와가 세상의 변화를 위협적인 큰 개로 인식할 때 느끼는 두려움은 상대적 두려움이다. 상대적 두려움은 변화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대상은 자신보다 더 크고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가져온 가상의 두려움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치와와가 자신이 살던 정신모형에서 나왔는데 세상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더 큰 개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마주할 때 위협적인 상대적 두려움을 경험한다. 치와와의 머리가 갑자기 하예지고 생각이 작동이 안 된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해하기 위해서 모두 달려들 것 같은 공포에 빠진다. 내 머리 속에 살던 치와와가 이런 공포감에 속수무책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상대적 두려움이다. 이런 상대적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한 치와와는 최대한 자신의 은신처로 도망처야 한다.
두 번째의 절대적 두려움은 치와와가 평소 깨달지 못하지만 실제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이 불확실하고 무서워서 치와와가 오랫동안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 못했을 때 결국 직면하게 될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다. 변화해야 하는 세상의 요구를 오랫동안 묵살하고 살았기 때문에 결국 어느 순간에는 큰 결심을 하고 나와도 이미 시간이 늦어서 도저히 적응을 못하고 강제적으로 세상에 의해서 폐기처분 당하는 두려움이 절대적 두려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다 결국은 죽은 자신을 직면하게 되는 두려움이 치와와가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절대적 두려움이다. 절대적 두려움은 변화를 거부하다 삶아 죽는 개구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큰 두려움이다.
지금과 같이 변화가 상수로 변한 세상에서는 2-3년만 집안의 치와와 생활을 했더라도 세상에 다시 나와도 적응하지 못하고 퇴출당한다.절대적 두려움은 불독이 무서워서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설적 두려움이다. 절대적 두려움에 직면하면 몸은 살아 있겠지만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심리적으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심리적 죽음은 생명을 단축시켜 물리적 죽음을 불러온다. 결국 변화를 거부해가며 오랫동안 집안의 치와와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직면해야 할 두려움의 실체는 죽은 자신을 직면하는 절대적 두려움이다.
치와와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큰 개들이 무서워서 밖으로 외출하지 않았던 삶을 계속할 경우 결국은 더 크고 절대적인 두려움인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절대적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치와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전두엽의 도움을 받아 자신 삶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이 확장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담력을 키워주고 확장된 새로운 울타리에서 살 수 있도록 근력을 만들어주는 일을 해야한다. 전전두엽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을 지속적으로 초월하고 확장해가며 삶의 근력과 담력을 길러내는 삶의 목적과 가치의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와와가 상대적 공포를 이길 수 있도록 전전두엽의 도움으로 물리적 생물학적 울타리를 넘어 더 큰 가치의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핵심 주장이다.
내가 몇 일내로 죽을 운명에 있을 경우 과연 나는 지금 당장 무슨 일에 집중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제기하는 질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꾸밈과 비본질적인 것인 것 연기하는 삶은 의미가 없다. 죽음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목적과 가치의 울타리를 세우고 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근력을 목적과 가치에 맞도록 훈련시키는 삶에 매진하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조언이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약속한 목적을 실현했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는 근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변화를 거부함에 의해서 맞게 될 자신의 죽음을 들춰내고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근원적 변화를 통해 자신을 살려낼 수 있는 용기를 획득한다. 작은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떨고 있는 치와와에게는 절대적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직면하는 용기가 찾아오지 않는다. 용기는 자신의 치와와를 큰 개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을 직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키운 사람들만 향유한다. 이런 용기는 자신의 가치와 목적의 울타리를 세우고 이 안에서 자신을 훈련시킨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가장 큰 용기는 큰 개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 죽음을 만나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