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08:15
[N.Learning] 주체의 분열 주인됨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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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분열
주인됨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소크라테스 클럽 도반들이 반드시 읽고 성찰의 길잡이로 세우는 철학자가 바디우이다. 진성 도반들이 바디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책이 <사도바울>이다. 바디우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진리의 증거자가 되지 못하는 비극을 겪는 이유를 설명한다. 바디우가 설명하는 설명의 핵심은 주체의 분열이다.
바디우는 주체의 분열은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이나 현대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라고 설명한다.
회사도 지금처럼 상황이 어려워지자 종업원에게 주인의식을 갖으라고 독려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종업원은 지분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주인의식을 갖는냐고 반문하고, 회사는 주인의식이란 주인이 아니라도 주인처럼 행동해서 불확실성이 증가해서 급등한 거래비용인 관리(대리인)비용을 좀 줄여달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종업원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경기가 좋아 잘 날 나갈 때는 회사에 몸만 가지고 오고 생각은 문밖에 걸어놓고 와서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라고 강요받은 트라우마가 생생한데 지금처럼 불경기가 깊어지자 안면 몰수하고 다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들어와서 주인처럼 행동하라고 하는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스컴은 이런 주장을 하는 경영진의 연봉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을 열심히 보도한다. 경영진이 주인의식을 가져달라는 속셈을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상황에 현실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종업원들은 조용한 사직 등을 규범으로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WLB라도 강하게 주장해서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우성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기업의 HR이 몸, 마음, 정신을 디커플링 시켜 각자의 수준에서 최적화를 위해 운용하다보니 부분최적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균열을 경험하고 있다. 주체성에 대한 근원적 반성과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 경기가 갑자기 좋아지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기업이 쉽게 회생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HR의 앞장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일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회사를 떠나 일상에서도 몸, 마음, 정신을 디커플링 시켜 최적화 시키려는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상에서도 몸 마음 정신이 따로 노는 분절된 삶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림에서 목이 셋인 낙타처럼 몸, 마음, 정신이 각자가 주체라고 주장해가며 각자가 원하는 삶을 주장하는 형국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삶은 이것도 해야할 것같고 저것도 해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공만 많은 배처럼 표류한다. 모두가 주체의 분열을 해결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목사, 정치가, 기업인을 중심으로 유체이탈의 화법을 쓰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의 유체이탈의 화법은 전염성이 강해 일반인들도 유체이탈 화법을 흉네내는 삶을 살게 되고 세상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상황이 심각해지는데도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감을 잡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주체의 분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주체의 분열 상태를 극복해 자신의 주체를 부활시킨 사람들만 온전한 주인됨의 상태를 향유한다. 주체를 부활시켜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
아마도 니체가 주인된 삶에 대해 쉬운 비유를 가장 잘 제시한 사람이다. 니체는 삶이 주인됨 상태가 낙타의 삶, 사자의 삶,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삶으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낙타는 몸과 마음과 정신 모두를 빼앗긴 상태다. 주인이 시키는대로 무거운 짐을 벗어던질 수 없는 삶이다. 남들이 시키는대로 종으로 사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모범생의 삶을 칭송하지만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모범생의 삶은 낙타의 삶의 가장 전형적 형태다. 둘째의 부류는 사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몸을 놀리지 않고 남의 몸을 수단으로 명령해가며 평안한 몸의 상태를 산다. 이들의 삶은 직책, 돈, 명예, 권력이 마음을 장악해 남들을 자신의 노예로 부리는 동안 돈, 명예, 권력에 대한 우상화로 그나마 순수했던 마음은 탐욕으로 불타 사라졌고, 정신은 점점 사막화되어 황폐해지는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외재성에 몰입할수록 자신이 누구인지 주체성은 더 쉽게 상실된다.
낙타와 사자를 넘어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을 향유하는 삶이 니체가 규정한 온전한 주체성이 발현되는 삶이다.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해질 수 있는 힘은 자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적에 충실해가며 살기 때문이다. 어른과 달리 어린이가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은 노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인도 목적에 근접해서 삶을 영위할수록 대부분의 일이 놀이로 전환된다. 하루하루의 삶이 목적에 근접해지는 가치충격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목적을 놀이처럼 사는 삶이다. 니체에게 주체의 분열을 극복한 주인의 삶이란 몽롱하게 잠자고 있는 정신의 의식을 일깨워 자신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이 목적을 실현하는 일에 마음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고 결국 몸도 일으켜 세우는 삶이다. 어린이의 삶이란 자신이 정신, 마음, 몸의 정렬된 주체로서 사는 삶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런 주체성을 복원한 온전한 주인의식만이 진리의 증거가 되는 삶을 산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사건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달성하기로 약속한 존재이유가 마침내 실현되는 상태가 진리사건이다. 결국 자신이 세상에 다녀감에 따라 이웃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지고, 건강해지고, 공정해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진리사건이다. 인간은 자신이 약속한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진리사건의 주체다. 진리사건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온전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의 삶에 주인의식을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복원한 정신은 의식을 일깨워 자신이 자기 의식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이 선언이 약속으로 지켜지기 위해서 스스로 삶의 헌장의 작가가 되어 서약서(Covenant)의 대본을 쓴다. 몸, 마음, 정신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가 쓰고 이 대본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선언한다. 설사 상황에 의해서 당분간은 몸,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대본대로 살 수 밖에 없어도 의식에 있어서는 자신이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 와서 낙타나 사자의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의식의 주인됨을 잃지 않고 의식을 살려낸 마음과 몸의 주인됨을 회복하는 회복탄력성 근력을 만들 것임을 약속한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를 통해 나찌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차이를 자신이 의식의 주인임을 잃었는지 잃지 않았는지를 결정하는 주인의식에서 찾았다.
나찌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용소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자신이 의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다. 인간은 암울한 상황이 닥쳐도 이 상황이 자신의 의식의 주인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이 거부의 근력에 따라 상황을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가 결정된다. 상황의 폭압에 굴복해 의식이 상황에 종속되는 순간 주인의식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정신의 주인됨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엄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이 정신의 주인임을 잃지 않고 상황의 압력에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다.
상황에 의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자기 의식의 주인됨을 지킨 사람들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아 남아야 할 삶의 의미와 이유(목적)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가상의 울타리를 만들고 이 목적을 상황에 개입시켜 새로운 맥락을 가진 운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정신을 지켜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어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다. 이런 정신의 주인됨을 회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쪼그라드는 죽음의 향연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빅터 프랭클과 같이 살아남았다. 정신이 설정한 자신의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한 답인 존재목적은 현실의 자신으로 쪼그라들지 않은 자신(Larger than ourselves)을 지켜나가는 힘이었다.
빅터 프랭클과는 반대로 괴테의 파우스트(Faust)는 몸과 마음의 극락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서 정신이 사는 집인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계약을 하고 몸과 마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향유한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로 불리는 악마와의 계약 기간 동안 흑마술로서 파우스트의 욕심을 충족시켜주지만, 계약 기간이 끝난 후 파우스트의 영혼은 악마 메피스토의 소유가 되고, 인간으로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저주받은 삶에 처해진다. 몸, 마음, 정신이 분절된 삶의 비극을 묘사했다.
동양에서 주인의식을 삶의 중심철학으로 잘 제시하는 철학자는 장자다. 이 장자의 주인의식을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분이 당나라의 임재선사이다. 임재선사는 주인의 삶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되어 살면 거기서 하는 모든 일이 진실로 서게 된다." 임재선사는 주인된 삶을 살기위해서 남의 써준 삼인칭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의식을 깨워 일인칭 주인공의 삶을 복원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임재선사도 바디우처럼 주인됨을 회복할 때만 진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조언한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주인의식을 상실한 낙타나 사자는 다 외재적으로 남들이 써준 삶의 대본을 자신의 대본으로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주체적 삶이란 스스로가 의식의 작가가 되어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대본을 써내는 일인칭의 작가와 주인공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일인칭 대본대로 사는 삶이 구현되지 못한다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진리는 깨달을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삶의 진실은 깨닫지 못한다.
직장인도 회사가 써준 대본에 따라 직장생활에 충실한다면 돈받고 연기하는 연기자의 삶을 사는 것이지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상당기간 이런 돈받고 연기하는 삶에 익숙해진다면 직장인들의 몸과 마음 속에서 어느 순간 죽어 있는 의식을 발견할 것이다. 직급이 없을 때는 낙타처럼 일하고 관리자가 되어 사자처럼 일하는 과정에서 일하려는 자기동기가 사라지면 회사는 돈을 더줄테니 주인의식을 가져보라고 요구하겠지만 이미 의식이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천만금을 더 준다해도 죽은 의식은 살아나지 않는다.
진실이란 자신이 주체가 되어 각성한 존재 목적을 현실의 일, 가정, 삶에서 실현시킨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삶이 지속되는 한 죽는 날까지 진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삶의 목적을 깨달고 정신 마음 몸의 주체성에 대한 분열을 극복해 한 주체로 통합해 이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본인이 자신이다. 바디우는 진실란 이 목적을 실현시킨 상태를 의미한다. 이 진실이 실현되어감의 상태가 자유이다. 이 목적을 실현시키기보다 이 목적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목적을 찾은 것처럼 연기하고 꾸미는 삶이 우리를 무언가의 노예상태로 만든다. 돈을 주고 받아가며 꾸밈과 연기하는 삶이 결국은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고 결국은 우리를 영원히 잘못된 길에 갇혀 생명없이 죽게 만드는 것이다.
직장이나 삶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도 약속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주변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약속할 수 있다면 주체성이 부활한 삶이 시작된다. 주인됨이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목적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한다. 존재의 수준에서 나를 차별화시킬 수 있는 목적이 없다면 나는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삶과 경력의 경쟁력자체가 사라진다. 삶의 진실이 되는 존재목적을 찾은 사람들은 포장하거나 연기로 시체가 된 상태에서 벗어난 생명을 머금은 삶의 산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목적에 대한 깨달음을 실현시킴을 통해 새로운 진실과 자유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됨은 남의 대본에 의지하지 않고 상황을 탓하는 삶에서 벗어나 몸, 마음, 정신의 주인인 자신이 진리의 증거가 되는 삶이다. 우리 스스로가 삶의 목적에 대한 작가가 되고 주인이되어 나를 통해 새로 태어난 생명이 진실이 되는 삶을 소망한다. 주인의식이란 상황이 암울해서 몸과 마음의 설사 빼앗기는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어 주인으로서 희망을 가지고 삶의 대본을 다시 쓰는 것을 의미한다.
저희 (사)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와 진성리더십 아카데미는 몸, 마음, 정신이 서로 찢겨진 아픔을 환대하고 치유해서 우리 모두가 온전한 주인이 되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플랫폼을 설계하고 실험합니다.
사진: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잠비아 남 루앙와 국립공원(South Luangwa National Park)에서 사진작가 사비에르 오르테가(Xavier Ortega·60)가 찍은 특이한 기린 사진을;
사람 인 (人)자가 형상하듯 사람들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독립된 인간으로 서로 기대가며 살 수는 있어도 타자성을 부인해가며 한 몸으로 사람 인 의(人)삶을 구현할 수 없다는 증거로 사용되는 비키니 자매에 관한 사례. 위키의 자료에 따르면 비키니 자매는 "1974년 1월 17일에 태어났다.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났는데, 각자 변호사와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성인이 되고서 분리 수술을 결심한다. 의사들은 실패 위험이 크다고 거부했지만 자매의 의지와 결심은 확고해 결국 2003년 7월 8일 싱가포르에서 수술하였고, 52시간의 사투 끝에 분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과다출혈로 동생이 먼저 사망했고, 1시간 반 뒤에 언니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