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08:27
[N.Learning] 축복인가? 저주인가 몸속가시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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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인가? 저주인가
몸속가시
삶에 궁극적 목적이 없는 사람틀에게 고난은 그냥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단기적 생존의 문제이다. 하지만 삶의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난은 목적의 진위에 대한 믿음을 검증받는 축복의 과정이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검증받은 사람들을 만나면 작은 고난들은 이들을 축복해주고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고난을 생존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은 가혹하고 처절한 시련이다. 고난은 악다귀가 되어 생존이 결판날 때까지 달려든다. 목적을 깨달지 못하고 고난을 이겨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인물 욥처럼 고난이 잊혀질 즈음되면 고난이 고난을 다시 부른다. 생존의 문제로 고난을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삶의 저주이다. 고난은 삶의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을 그냥 살려 두지 않는다.
고난은 인간이 자신이 약속한 목적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진정성의 근력을 가졌는지를 검증하는 시험이다. 성경의 전 역사도 목적을 가졌다고 공언한 크리스찬들이 진정 목적에 대한 믿음의 근력을 가졌는지 고난을 통해 시험을 보는 과정을 내러티브로 엮은 것이다. 존재목적에 대한 근력(믿음) 시험을 통과한 크리스쳔들만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린 고난의 시험을 통과한 근력이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축복의 땅에 대한 은유이다. 고난을 생존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신과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대담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신을 대상으로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에 몰입하는 것이다.
목적을 가지고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선한 의도를 분출하는 자신만의 간절한 스토리도 없이 고난으로 가득찬 삶을 이겨보겠다고 덤비는 일만큼 무모한 도전도 없다. 자신의 생존을 넘어 최소한 사랑하는 혈연적 가족이라도 배불리 먹여 살려야겠다는 세속적 목적이라도 있어야 고난은 잠시 유예된다. 아무 무기없이 전쟁터에 나서는 무모함을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목적으로 무장한 선한 의도없이 세상과 싸우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다. 목적없이 생존 때문에 덤빈 사람들이 설사 천운으로 고난에서 살아남아 넋놓고 있을 때 처들어 오는 고난은 이들을 철저하게 보복하고 굴복시킨다. 이들은 운좋게 삶아 남은 자신과 자신이 만든 사적 이유를 우상으로 만들어 신봉하다 고난의 보복을 견디지 못하고 처참하게 퇴출 당한다. 니체는 자신을 통해 고난이 반드시 극복되어야만 하는 이유인 목적을 알고 고난과 싸우는 사람을 다윗으로 모르고 싸우는 사람을 눈먼 골리앗에 비유했다.
목적을 창으로 삼아 고난을 극복하는 여정을 시작하다보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 몸 안에도 가시가 있다는 것을 각성한다. 고난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할수록 몸안의 가시가 난동을 부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좌절시킨다. 자신 몸안의 가시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부른다. 고난은 목적의 여정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의 부름을 받고 자신 몸안의 가시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은 자신이 생과 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령사다. 죽은 것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고통을 제대로 치유한 사람만 생명의 씨앗을 발아시켜서 생명의 나무를 키운다.
몸안의 가시의 존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시를 밖으로 던져 다른 사람에게 투사시켜 이들에게 고통을 선물한다. 자신 몸안의 가시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지 못하고 투사행위를 거듭하다보면 어느 순간 새디스트가 되거나 자신을 의도없이 괴롭해는 매조키스트로 변모해 있다. 정신분석에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몸 안의 가시를 은유적으로 성인아이라고 부른다. 성인아이란 자신이 손수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축적되어 몸안의 가시로 자라고 있는 것을 은유한다. 고통의 원천인 성인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면 인격을 가진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성인아이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마다 성인아이가 물귀신처럼 나타나서 발목을 잡아끌어 상황을 처음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자기도 모르는 성인아이라는 마음의 가시가 초래하는 더 큰 문제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스트레스는 다시 자신의 내면 혹은 자신과 다른 사람간의 불통으로 커가고 불통은 다시 몸의 결석으로 전환되고 결석은 병이나 암으로 전환된다. 따지고 보면 몸의 병은 이미 오래 전 마음 속의 가시가 만든 고통이 치유받지 못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난 것이다.
결국 핵심은 자신 몸안의 가시에 대한 통찰이다. 자신 몸 안의 가시가 주는 고통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자기취약성(Vulnerability)이다. 자기취약성을 인정하고 고통받는 자신도 자신으로 인정하고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자기긍휼감이다. 자기긍휼이란 잘난 것 재능이 있는 자산만을 편애하는 것을 극복하고 아픈 자신도 자신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행동이다. 몸안의 가시가 박히면 가시를 찾아서 뺄수도 있지만 이렇게 뺀 가시자리에는 다른 가시가 재생된다. 몸안의 가시는 빼는 작업이 아니라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기긍휼감을 통해서 녹여질 때만 극복될 수 있다. 자신에게 숨겨진 가시인 성인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성인아이의 고통조차도 자기긍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가시가 제거되는 실마리를 얻는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에게 문명이 시작된 원천도 자기취약성을 인정한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라는 치유의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였다. 인류는 낮에 사냥하고 채집에 나섰다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굴게 둘러앉아 서로의 상처를 치유했다. 둥굴게 둘러앉은 이유는 각자의 취약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의 등을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함이다. 루소는 이런 취약성에 대한 인정과 상처에 대한 온전한 치유를 통해 내일의 더 나은 삶에 대해서 희망을 논할 수 있었고 결국 이런 치유의 연대가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었다고 본다. 이런 원리는 지금도 보편적 문화의 원리다.
고난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내면의 가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면의 가시가 주는 고통을 인지하고 긍휼의 사랑으로 치유되지 못했다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인류와 사회와 조직과 개인의 번성을 결정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이 목적의 왈츠곡에 맞춰가며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지의 문제다. 바울이 자신 몸속의 가시가 주는 고통을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녹여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기독교도 존재할 수 없었다.
고통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리더라고 부르는 사람과 일반인을 구별할 방법도 없다. 서양에서 헤라클레스가 12개의 고통을 이겨내 리더가 된 이유도, 예수가 십자가라는 큰 가시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이유도, 맹자가 고자장에서 설파한 내용도 같다.
맹자의 <고자장>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모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 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자신의 몸안의 가시를 가진 자신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성찰해서 회사를 글로벌 기업을 키워낸 사람도 있다,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다.
나는 하늘에서 세 가지 은혜를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 첫째는 가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째는 허약함. 나는 허약한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을 써서 90이 넘도록 강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셋째는 못 배운 것. 초등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노력해서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
고노스케는 고난을 통해 얻어낸 근력을 전기제품도 만들지만 진실된 사람도 만드는 플랫폼인 마쓰시다를 창업해서 성공시켰다.
지금도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진 회사는 출중한 실력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여 있음에도 리더를 중심으로 자기취약성을 인정해가며 자신들 고통문제를 연대해가며 치유하고 해결해서 더 혁신적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유대감의 공동체 문화를 가진 회사들이다. 이들은 자기취약성을 인정하고 치유를 위해 연대할 때 자신들이 가진 전문성이나 재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하게 쓰여진다는 겸양의 원리를 안다. 이런 겸양에 근거한 근원적 자신감이 자만(휴브리스)를 극복하는 원리다. 구성원들이 가진 고통을 숨기고 자신의 재능과 잘난점을 경연시키는 신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인적자원을 운용했던 대부분의 회사는 휴브리스(자만심)으로 이고가 부풀려질대로 부풀려진 리더들이 장악했다. 이들은 대부분 이카루스처럼 날개를 밀랍으로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추락했다. 목적이 없는 추락하는 것는 날개없이 처참하게 죽음을 향해 추락하는 것을 뜻한다. 고통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를 겸양으로 자제시키는 브레이크다.
진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에서는 리더로 세워지기 위해 목적과 긍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을 고시패스(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