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08:39
[N.Learning] 우리 모두는 잠재적 정유정이다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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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잠재적 정유정이다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과외 앱을 통해 만난 여성을 집으로 찾아가 살해한 후 시신을 엽기적으로 유기해 사이코 패스 진단을 받은 정유정(23)에 대해 학교 동창들의 정유정의 학교시절이 증언되고 있다. 부산에서 같이 다녔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한결같이 정유정은 그냥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지만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한 친구는 졸업사진을 보고서야 정유정이 이 정유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공통된 결론은 특별히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증언이다.
정유정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사이코 패스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개인 정유정이 아니다. 정유정 개인을 떠나지금과 같은 초뷰카시대 길을 잃고 사는 평범한 젊은이들이 가진 사회적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사건이 일회적 사고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으로 발화되었다는 것은 정유정을 통해 표면화 되었지만 비슷한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유정의 건으로 이 사건과 똑같은 사건으로 발화되는 것은 주춤해지겠지만 정유정과 비슷한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의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정유정은 다른 비슷한 사건으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정유정과 같은 내성적이고 평범한 젊은이가 어떻게 악마의 대변자가 되었나?
설치 예술작가 Banksy 뱅시는 독일의 철학자 안나 아렌트에 영감을 받아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그림은 나치병사가 자연을 감상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통해 뱅시는 현대사회가 인류의 고향인 공동체를 상실한 병폐로 이런 평범한 악이 사회 곳곳을 전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뱅시는 동네 사람이 벤치에 앉아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감상하는 이발관 그림을 개작해 벤치에 앉은 사람만 나치 복장을 한 사람으로 바꿔치기 했다. 악의 평범성은 집단적 악행에 동원되었던 나찌 군인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다 평범한 옆집 아저씨 아주머니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이런 악행에 자연스럽게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뱅시는 현대사회에서 <악마의 대변인>은 돈받고 악을 변호하는 변호사나 가짜뉴스를 동원해 사욕을 챙기는 정치꾼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삶이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지면 지루함을 탈출하기 위해 누구나 쉽게 악마의 대변인으로 전락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해지는 이유는 삶의 의미가 샘 솟는 존재목적을 상실한 것에서 시작했다고 보았다. 니체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 즉 삶의 목적을 상실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온갖 미친 짓에 몰두한다고 보았다. 삶의 목적이란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길을 잃었음에도 나침반 없이 길을 찾기 위해 맨붕 상태로 허둥대는 모습을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목격한다면 다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규정한 "미친 짓"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와 기성종교의 율법주의와 세속의 원칙주의와 대 이은 모태신앙의 감옥에 빠질 때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들은 잘못된 신앙을 무기삼아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서 나치의 만행에 버금가는 만행을 자행한다고 본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명과 목적을 자신의 율법과 자신의 원칙과 사이비 교주와 모태신앙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예수는 니체와는 약간 결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예수는 악이 평범한 얼굴로 드러내는 것은 사랑이 잘못되었을 때로 규정한다.
예수는 사랑을 강조하지만 약자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해서 해결하려는 행동성향인 긍휼이 없다면 사랑은 그냥 편협하기 짝이 없는 자기애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예수는 자신이 행하는 사랑이 긍휼감이 발현된 진짜 사랑인지 자기애의 가짜 사랑인지는 대상에 따라 갈라진다고 가르쳤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 대해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것은 긍휼감이 발현된 진짜 사랑이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강자에게만 편파적 사랑을 보인다면 이것은 자기애이다. 긍휼이 없는 자기애는 역지사지라는 인간관계의 황금율을 실행하는 뇌의 거울세포를 마비시켜 평범한 사람을 소시오패스로 만든다. 예수는 긍휼감이 결여된 상태에서 자기애에 빠진다면 인간 누구나 악의 평범성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에 못박혀가며 경고했다.
정유정도 과외앱을 통해 좋은 스팩을 가진 살해 대상을 선택한 이유도 자신에 대한 긍휼감이었다기 보다는 이 사람의 정체성을 탈취하려는 목적의 자기애였다.
악의 평범성을 최초로 개념화한 사람은 안나 아렌트 (1906-1975)다. 안나 아렌트는 1963년에 저술한 <예루살램의 하이이만>에서 악의 평범성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말하기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낳았다." 아랜트에게 긍휼감은 사회의 소수로 치부된 사람들을 위해 힘있는 다수라고 칭해진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가면을 벗고 이들의 아픔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행동이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니체와 긍휼감의 상실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예수는 서로 만날 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예수와 니체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각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초뷰카라는 변화의 스나미에 길을 잃게 되면 다른 한 편으로 긍휼감이 고갈되어 자기애에 중독된다고 본다. 결국 변화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자신이 만든 일상의 감옥 속에서 진부해질대로 진부해지는 삶을 살게되면 인간으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재미있지만 다른 사람을 해하는 악을 자연스런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부해진 인간으로 전락하면 자기애와 자기 우상화가 서로 공모해가며 악의 평범성을 실천할 개연성이 높아짐을 경고한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미의 샘인 존재목적이 다시 세워지고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하고 치유하는 공동체의 복원을 통해서이다. 이런 목적과 환대의 공동체가 복원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진부해질대로 진부해지고 이 평범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악을 재미로 저지른다. 평범과 진부함을 이기지 못해 재미로 악을 저지르는 지옥이 현실에서 구현된다.
정유정은 초뷰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존재목적과 진정한 사랑인 긍휼을 상실한 우리에게 만연된 문제다. 우리 속에도 정유정이 살고 있다. 진부해질대로 진부해진 일상의 감옥을 재미있지만 칼이 숨겨진 악으로 탈출할지 희열에 대한 소망이 담긴 선으로 탈출할지를 선택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