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08:54
[N.Learning]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입증 경계의 의미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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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입증
경계의 의미
인간에게 경계 boundary란 살아 있는 자신과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객관적 세상을 구분 짖는 임의의 선이다. 살아 있는 자신을 움직여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의 영역 안과 자신이 맘대로 할 수 없는 의도 밖의 세상을 구별해주는 것이 경계다.
경계는 죽어 있음에 대항해 자신의 몸, 마음, 정신을 가지고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인간들만이 만들 수 있는 선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 하나님께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하나님은 'I am that I am"이라고 대답하신다. That을 쓰는 이유는 살아 있음과 죽어 있는 것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경계가 무의미한 분이라는 설명이다. 하나님이 인간이었다면 I am who I am이라고 표현하던지 I am the character (whom) I have created"라고 표현해야 맞다. Who(Whom)는 주체적으로 살아 있는 자신과 살아 있지 못한 객관적 세상을 구별하는 경계를 표현하는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관계 대명사다.
이 경계는 자신의 삶의 액자를 만들어 준다. 경계는 이 액자 안의 주체적 삶과 액자 밖의 객관적 삶을 구별해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고 실험하고 검증을 통해 의미 있게 살아 있는 세상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이다.
변화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서 의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내면의 경계와 지금은 자신이 개입해서 바꿀 수 없는 외적 경계의 울타리를 제대로 성찰하는 것에서 변화여정을 시작한다. 이들은 내적 경계 안에 자신만의 의미 있는 경계 확장을 위한 실험실도 세우고 경계가 확장된 세상에서 일어서서 달리고 춤출 수 있는 근력을 미리 만드는 헬스장을 세운다.
내면의 살아 있음의 경계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은 내면에 실험실이나 근력 단련 헬스장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내면을 모든 외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구별하지 못하는 성향은 마치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의 세상이 모든 세상이라고 믿고 자신의 내면과 동일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 내면 세상을 강요하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십자군 전쟁은 타아와 자아 사이의 의미 있는 사회적 거리가 무시될 때 발생한다. 모든 십자군 전쟁은 의미 있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로 자신만의 살아 있음의 정체성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의 비극적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이 심각해지면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계를 무의식적으로 침범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분류되 고립된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활보하다 새롭게 설정된 물리적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침범하다가 사고를 당해 비명횡사 하거나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주체적으로 살아 있음의 경계를 아는 사람들은 이 경계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통해 상황을 맥락으로 바꿀 수 있는 내부 범위와 경계를 벗어나서 아직도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끼워 넣을 수 없는 외부 환경으로 구별한다. 이런 분명한 경계 설정으로 모든 외부의 적과 소모적 싸움보다는 시간과 기회가 날 때마다 이 자신의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가는 조용한 싸움을 통해 세상을 소리 없이 바꾼다. 의미 있는 경계를 성찰해낼 수 있는 사람들만 근원적 변화에 성공한다.
진정으로 변화에 성공하려면 자신이 주체적으로 개입 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과 범위 밖에 존재하는 것을 구별하고 범위 안에서 조용하게 성공하는 체험을 축적한다. 이 성공 체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변화의 범위를 조금씩 확장시켜가는 사람들만이 실질적 변화에 성공하는 사람들이다.
의미 있는 경계를 가지고 자신의 내면에 실험실과 근력을 위한 체력단련실을 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에 실패한다. 내면의 변화에 실패했을 때 이들은 변화에 실패한 자신을 숨기고 주변을 변화시려고 시도한다. 자신을 변화시키는데도 성공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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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목적의 자기 진실성을 입증할 철학
경계의 역설과 자유의 체험
경계의 역설(paradox of boundary)이란 평소 통용되는 기준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의 경계를 정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자기조직화를 위한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원리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에서 소산구조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일리야 로마노비치 프리고진(Ilya Romanovich Prigogine: 1917년 1월 25일 - 2003년 3월 28일)가 주창한 이론이다. 프리고진은 모든 분자구조를 가지는 것은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경계>가 내재화되어 있을 때만 자기조직화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 국가도 경계가 있기 때문에 이 경계 내에서 참여자들이 목적을 세우고 자기조직화가 가능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경계가 없는 도시는 자족적으로 진화할 방법이 없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조직의 경계가 없다면 적절한 활동범위와 이 활동의 수혜자를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 몸도 경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기관들이나 분자들이 이 경계의 범위 내에서 자기조직화 하는 방식으로 신진대사를 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거나 축소시킨다.
인간이 설정하는 경계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경계도 있고, 마음의 경계도 있고, 자신의 정신 세계를 구획해 주는 철학적 세계관으로 설정된 경계도 있다. 경계의 역설은 자신이 삶의 존재목적에 대한 보편적 철학으로 세운 경계가 있다면 물리적 경계와 심리적 경계는 이 철학적 경계에 포함되어 물리적 심리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법으로 설정한 경계도 있을 수 있고, 법이 없어도 타인에게 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적 윤리 경계도 있을 경우 상식적 윤리 경계를 설정하고 지키는 사람은 법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향유한다. 상식적 윤리적으로 살아왔던 사람이라는 명성이 쌓이면 이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누린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법의 감시망을 벗겨주기 때문이다. 법보다는 높은 수준인 상식적 윤리 경계를 초월해서 자신만의 철학적 경계를 가지고 산다면 이 사람은 남의 눈초리라는 상식적 감시망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을 법으로 지배하고 남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철학을 통한 자기규제가 가져다주는 고차원의 자유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법으로 모든 질서를 다잡겠다고 나서는 사회는 가장 초보적인 사회다. 남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규제하겠다고 나서는 사회는 원시부족 사회와 같은 기계적 사회다. 시민 선진사회란 적어도 다수의 시민들이 법과 상식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철학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규제해가며 사는 사회다.
네거티브 규제와 파지티브 규제도 경계의 역설이 적용된다. 우리나라에도 기업들에 대해 네거티브 규제를 하는지 파지티브 규제를 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네거티브 규제는 필수적인 몇 가지를 빼고 나머지 모든 것은 허용하는 규제이다. 파지티브 규제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못하게 하는 규제이다. 당연히 자율적 혁신이 일어나려면 규제가 파지티브 규제에서 네거티브 규제로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기업가들의 수준이다. 기업가들이 탐욕스러워서 이들의 모든 것을 법으로 일일이 정해 놓고 감시해야 하는 수준이라면 이런 사회에 네거티브 규제를 허락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된다. 네거티브 규제를 통해 혁신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한 국가의 대다수 기업가들의 의식 수준이 법과 상식을 넘어서 스스로의 철학으로 규제되는 수준을 보일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고유한 철학으로 윤리적이고 이보다 더 높은 자발적 행동에 대한 성숙도를 보이지 못한 기업인이 모든 규제를 풀어 달라는 네거티브 규제를 주장한다면 자신이 고양이인데 생선을 달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네거티브 규제와 파지티브 규제는 양자택일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가들이 윤리적, 철학적 성숙도의 문제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네거티뷰 규제는 기본적으로 참여자의 자율에 믿고 맞길 수 있는 철학과 시민의식이 성숙된 사회에서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네거티브 규제를 허용하는 시민국가에서는 혹시나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징벌적 처벌 제도를 도입한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유전무죄로 대부분 석방된 재벌총수들이 만약에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아마도 종신형으로 지금도 감옥에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징벌적 처벌과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할 수 있을 정도로 기업가들의 철학적 경계를 통한 시민의식이 성숙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업에서 운용하는 가족의 개념도 경계의 역설이 적용되는 영역이다. 기업에서 중요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가족을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기준으로 운용한다면 이런 회사는 아무리 자유와 자율을 허용해도 혁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업의 존재목적과 핵심가치에 몰입하는 지를 가족의 정의로 받아들이는 회사는 자율성을 통한 혁신의 성과가 자연스러운 회사가 된다. 이런 회사는 회사 회장의 자식이어도 회사가 설정한 가치와 존재목적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중요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회사다. 역으로 이런 회사는 회사의 회장과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엮이지 않았어도 회사의 철학에 몰입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든 중요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회사다.
이건희 회장이 관리의 삼성을 자율의 삼성으로 바꿀 수 있을 때 자발적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고 재임기간 중 다양한 제도와 복지와 인센티브 시스템을 동원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진정한 자율적 혁신은 보편적 존재목적에 대한 철학이 존재하고 이 철학이 삼성가족의 내면적 경계를 구획해줄 수 있을 때만 일터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체감하게 하는 경계의 역설을 놓쳤다.
르네 마그네트는 경계의 역설을 잘 묘사하는 그림이다. 자신이 가장 높은 수준의 철학적 경계를 세우고 자기조직적으로 자기규제적으로 살 수 있다면 모든 세상을 이 경계 안으로 담을 수 있는 근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근력을 인정받은 철학적 경계를 가진 사람들만이 다른 경계를 모두 품고 새가 되어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비행자유를 만끽한다. 스스로 탐욕으로 경계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면 사회는 더 엄격한 기준으로 행동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반면 스스로 내재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행동 자유를 허용하는 원리를 묘사한다.
김구선생이 천명한 문화강국이란 바로 대부분 시민들의 행동이 법과 윤리를 넘어 자신 미래에 대한 철학에 의해 조직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지금 처한 혼돈은 결국 정치가들이 법과 상실을 초월해 자신을 내면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철학 부재가 초래한 문제다. 지금과 같은 초뷰카 시대에도 여전히 자유를 마그네트가 제안하는 자유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이나 화석화된 공산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정치가들이 자초한 혼란이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혼란은 존재 목적의 자기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철학으로 무장한 리더십의 부재가 초래한 비극이다.
바닷새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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