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0-09 15:06
[N.Learning] 운명 공동체의 복원: 게마인 샤프트 게젤 사프트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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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운명체의 복원
다시 사라진 국가
일전에 심리학 교수님과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분께서 퇴니스(Ferdinand Tönnies)라는 독일 사회학자가 언급한 게마인 샤프트 (공동사회 Gemeinschaft)가 사라지고 이득만 따지는 게젤 샤프트(이익사회 Gesellschaft)가 대한민국을 장악했다고 우려하는 말씀을 들었다. 개인에 대해 연구관심을 집중하는 심리학자가 나서서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정도면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정말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사회는 구성원간에 정서적 유대감에 의해서 연결된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Common Fate)로 공동체를 통해 구성원들은 전인적으로 교류한다. 가족, 마을, 도시, 종교단체, 국가 속에 그 형태가 남아있다. 이익사회는 구성원이 이익을 매개로 연결되어진 결사체들이 지배하는 사회다. 서로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결사체다. 전인적인 상태가 아니라 회사처럼 자신의 일부만 투자해 계약과 거래관계로 결합시켜서 만든 이익결사체다.
이익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자신이 기여한 만큼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공정성이고, 공동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서로에 대한 긍휼의 사랑이다. 긍휼의 사랑로부터 파생해 만들어낸 감사, 헌신, 죄의식, 겸허, 고양, 빚진마음, 자부심과 같은 따뜻한 윤리적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 개념을 제시한 퇴니스는 사회가 산업화되면 상대적으로 이익사회의 부분이 늘어나겠지만 이런 이익사회가 초래하는 병리적 현상을 인식하게 되면 공동사회를 복원하여 치유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결국 공동사회와 이익사회가 같이 성장하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좋은 사회의 원리로 등장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심리학자가 걱정하듯 대한민국에서 이익사회의 부분은 급증하는데 공동사회의 국면이 점점 퇴락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는 사회를 기능적으로 구성하는 한 몸통이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두 부분이 모두 작동해야 한다. 마치 빙산과 같다. 이익사회는 빙산의 윗부분이고 공동사회는 잠긴 부분이다. 빙산의 윗부분인 이익사회가 커지기 위해서는 빙산의 아랫부분도 그만큼 커져서 유대와 신뢰의 부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구성원 대부분이 계산기를 두드려 빙산의 윗부분만 갑자기 커지면 빙산은 침몰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익결사체가 많아졌는데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가 작동하지 않으면 휘발유는 있는데 윤활유가 떨어진 자동차와 같은 사회가 된다. 휘발류는 채워진 혹은 채워질 것으로 기대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눈에 보이는 이득이다. 윤활류는 긍휼의 사랑을 통해 만들어낸 감사, 희망, 회복탄력성, 자긍심, 효능감, 헌신, 죄의식, 겸허, 용기, 신뢰, 고양, 자부심과 같은 따뜻한 윤리적 감정이다. 이런 윤리적 감정은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사단 칠정의 사단과 같은 감정이다.
사회의 두 기능 중 공동체 부분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으면 구성원은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구성원을 운명공동체로 생각해가며 유대와 긍휼로 연결해주는 공동체의 기능은 사라지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구성원만 많아지면 사회는 점점 침몰한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을 앞장 세워 일을 하려면 모든 것을 현금으로 결재해야 한다. 현금이 없다면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미래를 위해 신용을 동원해 거래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만 살아남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중시하는 현금이 모든 가치를 집어 삼킨다. 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사회는 경제적 부를 가진 사람들의 이기심이 모여 만든 집단사고로 붕괴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익사회는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상대와 경쟁하고 협상해야하는 사회다. 당연히 갈등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공동사회는 이런 이익사회 생활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고 환대하는 성소이다. 공동사회가 사라져 치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는 상처받고 쓰러진 대다수의 약자와 상처를 주는 강한 소수로 사회가 양극화된다. 쓰러져 아파하는 대다수 약자들에게 통증을 순간적으로 완화시키는 마약을 처방해 이들을 중독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마약사회가 전개된다. 사회가 모든 일에서 경쟁과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을 강요하는 피로사회를 넘어 마약사회로까지 진전되면 희망은 없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운명공동체를 구성하는 빙산의 아랫부분이자 자동차의 윤활유 기능을 하는 가족, 마을, 도시, 종교 국가가 제대로 운명을 연결해 엮어내는 운명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이 무너지면 마을과 도시가 나서서 외연의 울타리를 보수해 공동체를 살려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도시와 마을이 역할을 못하면 종교가 나서서 외연의 울타리를 둘러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미 종교에 대한 희망을 잃고 종교를 떠났다. 마지막 보루는 국가가 나서서 운명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복원해야 하는데 국가의 지도자도 자신에게 이런 책무가 부과되어 있는 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역으로 국가를 자신들 가족, 족벌, 카르텔의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용하고 있다. 운명공동체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자신들의 패거리 이득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 기업을 중심으로 자성운동이 일어났었다. ESG운동이 그것이다. 기업이 원료를 채취하느라고 상처 낸 자연 환경을 다시 환대 치유하고, 마을, 경쟁사, 고객, 협력 하청업체로 구성된 공동체를 환대하고 치유해내고, 회사의 내부의 구성원에게 준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하려는 각성이 있었다. ESG는 기업들이 나서서 자연과 공존하고, 공동체와 공생하고, 구성원들과는 공영하는 운명공동체를 복원하는 운동이다. ESG 운동도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자나 주주들 이익과 이기심에 의해 ESG Washing으로 변질되어 힘을 잃고 있다. ESG에 열성이던 회사들도 일본이 나서서 지구의 공동생태계인 태평양에 오염수를 폐기처분해 지구에 상처를 주려는 행동에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자국의 위험을 외주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 함구함을 통해 사망선고를 당했다. ESG에 대한 열정이 천명했던 공동운명체인 지구의 부활이 아니라 자신들 이익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님이 폭로된 것이다.
지금과 같은 초뷰카시대(Hyper VUCA Era) 세상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 중 초우량기업은 이런 요란한 ESG를 떠들지 않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ESG를 자신의 존재목적과 사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조용히 실천하고 있었던 기업들이다. 이들은 존재목적을 문화로 실현시켜 공동운명체라는 빙산의 밑둥을 회사 안에 살려낸 회사들이다. 회사의 기술적 역량을 실현해 누구보다 경쟁력이 있는 이익결사체를 실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회사의 운명공동체 기능을 복원해 존재우위의 문제도 탁월하게 실현할 수 있음을 입증한 회사들이다.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서 운명공동체의 마지막 보루인 국가에 대해 "이것이 국가냐?"라는 국가에 대한 정체성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