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2-17 11:45
[N.Learning] 거울은 스스로 웃거나 울지 않는다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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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스스로 웃거나 울지 않는다
삼인칭이 된 일인칭
트루만 쇼라는 짐 캐리 주연의 영화는 삼인칭 객체로서의 삶에서 탈출해 일인칭 주체로 변신하는 근원적 변화에 관한 영화다. 짐 캐리가 연기한 트루먼(Truman)은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태어날 때부터 꾸며진 무대이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연기자이고 자신의 삶이 라이브로 전 세계에 방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트루먼은 이런 가상의 무대에서 PD가 써준 대본대로 사는 삶을 벗어나서 자신이 일인칭 주인공으로 사는 삶을 살기 위해 무대 밖으로 탈출한다. 트루만의 라이브 쇼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트루먼의 탈출을 열열히 응원한다. 마침내 트루먼이 탈출에 성공하자 방청객들은 감격의 눈물로 환호한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난 후 이들은 또 다른 트루먼 쇼를 찾아서 TV 채널을 돌린다.
TV에서 유튜브, 티톡, 쇼츠로 매체가 바뀌었지만 우리는 또 다른 남들의 감동적 이야기를 찾아서 채널을 돌리는 삼인칭 관객의 지위에 고착되었다. 고착을 넘어 삼인칭 관객이라는 관종의 감옥에 갇혀서 산다. 우리는 트루먼 쇼와 같은 프로그램이 없으면 먼저 웃거나 우는 일인칭 주체로서의 지위를 빼앗겼다. 우리의 삶이 완벽한 삼인칭을 구현하는 거울의 삶으로 전락했다. 거울은 먼저 웃거나 먼저 울지 못하는 삼인칭의 대명사다. 삼인칭 관객의 감옥에 갇혀 이런 프로그램을 소비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이 어느 순간 관종을 위한 거울로 전락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요즈음에 논란이 되고 있는 초개인화가 일인칭 주체의 삶을 삼인칭 객체로 만드는 원흉이다. 알고리즘은 개인을 삼인칭으로 만들어 주체적 일인칭의 지위를 빼앗았다. 알고리즘이 지향하는 삼인칭화된 일인칭이 실현되면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의 완벽한 소외를 경험한다.
왜 그럴까?
초개인화란 AI 알고리즘에 의해서 개인의 정체가 모두 파악된 개인을 의미한다. AI 알고리즘은 개인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 비슷한 범주로 묶어서 분석한다. 같은 직업, 연령, 지역, 성별 등등 범주를 이용해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한다. 비슷한 범주의 사람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분석(Between Subject Analysis)이 끝나면 한 개인의 과거에서 현재까지 행적을 다시 분석(Within Subject Analysis)해서 외적 개인과 내면적 모습 모두를 알아낸다. 알고리즘에 의해서 분석이 끝나는 순간이 사람들이 느끼는 초개인화 감옥으로의 전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알고리즘을 만드는데 돈을 제공한 회사와 많은 활로워를 거느린 자칭 타칭 인플루언서와 결탁해서 개인에게 특정한 소비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에 의해서 파악된 개인은 절대로 이 소비 제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제안대로 "뿌링클"에 돈을 쓰지 못하고 "시럽급여(실업금여)"를 받아서라도 "샤넬" 선글라스를 사는 결단을 못하거나 돈이 얼마가 들어도 "화룡점정"으로 알려진 체험에 돈을 못쓰면 소외된 사람으로 비난한다. 개인이 추앙하는 초개인화(Hyer Individualization)란 알고리즘의 노예로 완벽하게 전락한 몰개성화(De Personalization)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개성을 상실한 몰개성화된 인간은 알고리즘의 음모에 완벽하게 걸려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몰개성화된 초개인은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방송, 소비, 삶, 장소, 여행, 등등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매트릭스의 삶을 집행하는 앤더슨의 숙주로 전락한다. 알고리즘의 숙주로 전락한 것이다. 알고리즘의 숙주로 전락하면 쇼츠와 추천된 드라마를 봐가며 몇 시간이고 웃고 울지만 단 1초도 주체적으로 웃거나 우는 것의 행위가 금지된 거울로서의 삶을 산다. 일인칭 주체만이 자발적으로 먼저 웃거나 운다. 삼인칭 거울은 절대로 먼저 웃거나 울지 못한다.
초개인주의는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디지털 알고리즘과 디지털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가 인플루언서 앤드슨 요원으로 동원해 만들어낸 산물이다. 초개인주의를 옹호해가며 트랜드 분석을 하는 전문가들도 알고리즘에 의해 조정되는 앤더슨 요원이다. 이들은 초개인주의를 탈출하면 어떤 포비아가 벌어질 것인지를 경고하여 공포를 조성한다. 이들 모두는 알고리즘의 충실한 숙주일 뿐이다.
어떻게 일인칭 주체로서 먼저 웃고 먼저 울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을 복원할 수 있을까?
본인과 공동 연구자들은 이런 초개인주의의 무서운 함정을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경고해왔다. 이런 초개인화로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개인들을 회복하는 패러다임으로 치유 공동체와 목적에 대한 사회적 헌신을 제안해왔다. 이런 연구 결과를 담은 저서가 <몰개성화된 세상에서의 사회적 헌신(Social Commitment in Depersonalized World)>,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만든 질서 (Order on the Edge of Chaos)>, <초뷰카 시대 지속가능성의 실험실>이다.
초개인화된 인간은 모래알로 쪼개진 개인이다.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관계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적 정서적 연결이 금지된 개인이다. 알고리즘은 개인을 사막의 모래알 만들어 각자도생의 삶에 매진하게 만든다. 알고리즘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은 쪼개고 지배하라(Divide and Conquer)다. 자신들의 허락하는 연결을 제외한 인간들 사이의 연대가 불가능하도록 최대한 개인으로 잘게 쪼개서 이들을 뭉치지 못하게 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다. 이런 알고리즘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개인주의를 추앙해가며 각자도생하며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상처 받고 쓰러졌음에도 아픈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치유해주는 공동체가 존재함을 알게 되는 경우다.
초개인화 된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모든 공동목표를 개인목표로 환원해 분초단위로 관리하는 To Do List를 만든다. 알고리즘은 이미 조직에서 계층을 분해해서 평면화 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들 삶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수직적 계층제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이들에게는 각자도생의 개인 목표를 의미 있는 목표로 조직해서 묶어주는 공동목적이 이들 삶을 의미있게 조직해줄 수 있는 희망이다. 다양한 개인이 공동의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전문성으로 헌신하고 이 과정에서 더 의미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사회적 헌신(Social Commitment)이라고 부른다. 공동체의 복원과 공동의 목적에 대한 사회적 헌신만이 인간이 사막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어 주는 끌개(Attractor)이다.
오늘은 쇼츠에 의존하지 말고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되살려 아니면 미래의 희망을 생각해가며 내 의지대로 웃거나 울어보자. 초개인화를 주창하는 숙주에 현혹되지 말고 과감하게 삼인칭화된 일인칭의 갑옷을 벗어던지자! 오늘 만이라도 알고리즘의 숙주로 사는 삶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보자. 누가 알겠는가? 오늘 시작한 작은 발걸음이 우리를 근원적 변화를 만드는 사건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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