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12 18:04
[N.Learning] Why에 관한 두 개의 질문 성공의 덫과 실패의 덫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08  
Why에 관한 두 개의 질문
성공의 덫과 실패의 덫
번성하는 사람들은 Why, How, What이 Why에 의해서 정렬된 삶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 정렬된 모형이란 Why를 정점으로 최적화하는 모형이다. Why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없다면 자신의 우연히 만들어낸 성공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찾아온 성공을 유지하고 지렛대로 이용해 더 나은 성공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Why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이렇게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이다. 인간의 개입이 끝나는 지점인 죽음 시점까지 자신이 누적해서 만들어낸 상상적으로 성공한 마지막 모습이 이 Why 질문에 대한 가설적 답일 것이다.
이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죽음의 지점까지 이런 상태를 상상하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상태가 찾아올리 없다. 이런 최종 성공을 만들어주는 원인(Cause)을 찾아서 지금 당장 개입해서 원인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실험해야 한다. 그런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더 나은 원인을 찾아서 지속적으로 실험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적 비밀이 있다면 이것이 성공의 알고리즘인 How다. 실험을 통해 How를 찾아냈다면 이것을 강화시킬 수 있는 What을 찾아서 다시 정신모형을 정렬시켜야 한다.
기업에서도 이런 정렬된 정신모형을 비즈니스 모형으로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고유한 Way가 있다고 칭한다. 백년기업을 달성한 기업들은 모두 회사만의 고유한 알고리즘에 해당하는 정렬된 Way가 있다. 기업이 Way가 있다는 것은 한 시점에서 성공을 만들어내는 원인인 기술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발견한 How의 기술이 있다면 이것이 Why를 실현시킬지를 지속적으로 실험해야 한다. 기업은 이런 How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what이다.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제품이 Why에 의해 정렬되어 있을 때 What은 업으로 분류된다.
기업이든 사람이든 지속가능한 성공를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Why에 대한 질문 중 결정적으로 놓치는 질문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더 나은 원인을 찾지만 성공하면 왜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성공한 결과에 대한 Why의 질문을 놓치면 성공을 당연시하고 결국 성공의 덫에 갇혀 쇠망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에게 더 위험한 덫은 실패했을 때 Why 질문을 던지지 못해 경험하는 실패의 덫이 아니라 성공했을 때 Why 질문을 놓쳐 빠지게 되는 성공의 덫이다.
아서 애쉬(Arthur Ash Jr)는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 테니스 선수다. 애쉬가 태어난 버어지니아 주는 남북전쟁시 남부군의 수도였다. "흑인은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없다"는 버지니아 주법이 있었다. 테니스는 백인만이 잘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인종차별을 법으로 명시한 것이다.
애쉬는 이런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에 테니스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버지니아를 떠나 캘리포니아의 UCLA 대학에 진학해 선수로 활약한다. 졸업 후 테니스를 지속해 US Open, 호주 오픈에 이어 1975년 윔블턴에서 그랜슬램을 달성한다. 애쉬는 백인만 테니스를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미신에 불과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 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깼다.
1975년 윔블턴 우승을 기점으로 은퇴하고 사회적 편견을 깨는 다양한 활동에서 인권 운동가로 변모한다. 이 당시 심장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1988년 심장수술 도중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된다. 이 당시만 해도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극심했고 치료제가 없어서 감염은 죽음을 의미했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애쉬는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돕는 재단을 설립해 1993년 죽는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에이즈 퇴치 운동에 나선다.
이 당시 주변 사람들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애쉬에게 재단 일로 시간을 쓰기보다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때라고 충고했지만 애쉬의 생각은 달랐다. 애쉬 사망후 에이즈 재단에 충분한 기금이 축적되어 부시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방문해 전달했다. 실제로 이 기금을 통해 아프리카 수만명의 에이즈 환자들이 살려졌다.
수혈과정에서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기자들이 애쉬에게 에이즈 환자가 자신에게 준 고통을 미워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인터뷰에 애쉬의 답변이 유명한 "왜 나에게 (Why Me)?"다.
애쉬는 1975년 자신이 윔블턴에서 우승했을 때 하나님께 "왜 나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나요?"라고 묻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런 부끄러운 자신에 대해 얼굴을 바꿔 고통에 대해 "왜 나인가요? 물을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애쉬가 세상을 떠난지 근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편견으로 가득했던 세상에서 고난을 감내하기 위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 지에 대해 애쉬가 물을 수 없었던 유예 질문을 우리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물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애쉬가 겪은 고통에서 면제받은 우리들도 "왜 나인가요?"를 적극적으로 물어야 한다. 특히 부모의 유전자 복권과 부모의 경제력으로 선택된 삶을 향유해온 사람들은 반드시 애쉬를 대신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Why)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만 이런 엄청난 유전자 복권과 성공의 행운을 주시는 건가요?"
대한민국은 유전자 복권을 타고 났으면서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왜 나에게 이런 엄청난 행운을 주셨나요라는 Why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리더로 세운 것이 지금의 비극을 초래했다. 이들도 자신의 성공에 자신들의 노력을 보탠 것도 사실이지만 유전자 복권에 배제된 사람들이 이들이 가한 수준의 노력으로 이들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이들이 유전자 복권을 이용해 성취한 성공에 눈이 멀어 이들을 리더로 세우는 불운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이들 성공의 현란한 연기에 또 다시 속지 않는 대한민국을 소망한다.
최근 한 국제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부의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에서도 극단적 양극화를 통한 혜택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런 <애쉬의 유예 질문>에서 스스로를 면제시킨다면 노블리스 오블리지는 고사하고 국가의 토양은 지속적으로 산성화되어 사회자체가 붕괴하는 수준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