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옥션을 창업하고 지금은 (사)도전과 나눔 이사장으로 벤처 청년들 육성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금룡 이사장과 점심을 같이 하다가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살아 생전 가르쳐준 인재제일 철학에 관해 들었다.
이병철
회장의 인재제일 철학의 요지는 "능력은 상수"고 능력과 재능이 있는 인재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인지가 변수라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생각했던 삼성의 인재의 핵심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뛰어나도 믿고 맡길 수 없다면 그 인재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재주 많은 원숭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재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입사 면접에 관상쟁이까지 동원했다는 비사가 있을 정도이니 이병철 회장이 삼성의 인재를 정의하는데 얼마나 "믿을 수 있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IBM도 컴퓨터가 민주화된 세상을 연 회사라는 공헌도 있지만 더 큰 공헌은 글로벌 인재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삼성도 삼성전자를 통해 디지털 세상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 메모리 기반을 제공한 것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인재사관학교였다는 점이 더 큰 공헌이다. 네이버의 창업자 이해진, 카카오의 김범수도 삼성 SDS 출신이다. 이금룡 회장도 삼성물산 출신이다. 지금도 벤처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상장사의 임원들 절대 다수는 삼성출신이라고 보면 맞다.
능력을 상수로 보았을 때 변수인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 즉 "믿을 수 있는 인재"란 무엇일까?
진실한 믿음은 일인칭 주체로 나서서 헌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다. 예를 들어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객관적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헌신할 수 없다면 미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은 실현되지 않는다. 실현될 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헌신은 누구나 믿는 삼인칭 믿음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되는 체험이다.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서 믿음은 죽은 믿음에서 살아 있는 믿음으로 전환되고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실상으로 미래는 현실이 된다.
헌신(Commitment)한다는 것은 일인칭 믿음을 따랐을 때 오는 모든 희생과 아픔을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자신이 정한 믿음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누가 나타나 더 좋은 믿음이 있다고 꼬여도 이 더 좋다고 주장하는 믿음을 포기해가며 기회 비용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헌신이다. 헌신이란 자신의 일인칭 믿음을 실현하는 일보다 더 좋은 대안이 생겨도 이 대안과 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가져올 결과를 비교하는 일에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겠다는 의지다. 믿음은 대안이 가져올 기회비용에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헌신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예는 결혼이다. 결혼할 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을 혼인 서약(Marrige Commitment)라고 부른다.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 지를 알아보기 위해 서로에 집중하는 것을 약혼(Engagement)라고 부른다. 서약(Commitment)과 약혼(Engagement)은 천지차이다. 약혼은 상대에 몰입하기는 하지만 다른 더 나은 대안이 떠오르면 이 둘 사이 기회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허락된 상태다. 혼인서약은 더는 기회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에게 올인하겠다는 의미다. 결혼 생활 중에 더 나은 상대가 나타나 손해가 명백하더라도 희생을 감내하고 자신이 선택한 상대에게 머물겠다는 뜻이다.
다른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도 이 상대로 옮겨 타는 기회비용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관계에 헌신함을 통해 손해 보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상대 때문에 상처 받을 개연성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신뢰다. 관계에서 신뢰는 미래의 화폐이자 어음으로 작용해 미래를 개척하는데 사용된다. 헌신(Commitment)은 미래를 개척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신뢰자본을 만들어낸다. 헌신이 없다면 모든 거래를 다 현금으로 계산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현금만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현금으로 미래를 만든다는 것은 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병철 회장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것은 현금이 아니라 본인과 구성원의 헌신을 통해 만든 신뢰자본이 동원된 것이다.
한 때 GE의 중흥을 이끌었던 잭 웰치 회장에게 기자들이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능력은 있지만 회사의 철학에 헌신하지 않는 인재와 능력이 좀 떨어지지만 회사의 철학에 헌신하는 인재가 있을 때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잭 웰치 회장은 후자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GE정도 되는 회사라면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회사가 나서서 할 수 있지만 회사의 철학에 헌신하는 문제는 회사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 발매된 (사)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원 김경묵 원장의 <이도 다이어리>에 보면 세종의 인재철학은 이병철 회장이나 잭 웰치 회장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병철 회장이나 잭 웰치 회장이나 믿고 맡길만한 인재인지의 문제는 자신들이 나서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반면 세종은 믿음도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가며 인재를 등용했다. 세종의 인재철학은 능력이 있는 신하가 먼저 계산기를 두드려도 세종 자신은 희생을 감내해가며 먼저 믿고 더 맡겨주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세종이 발굴한 인재들은 처음에는 계산기를 두드리지만 결국에는 세종의 헌신에 대한 철학을 깨닫고 계산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헌신은 미래에 대한 자신이 가진 믿음 때문에 다른 다른 대안이 주는 기회비용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헌신은 심각하고 위험한 결정이다. 잘못된 헌신은 감당할 수 없는 함몰비용(Sunk Cost)을 초래해 많은 사람들을 파산시킨다. 실제 잘못된 사이비 교수에 헌신해 구성원 모두가 집단자살한 오대양 사건과 비슷한 사건들이 매스컴에 넘친다. 헌신하기로 결정했다면 헌신해야 할 대상이 올바른 대상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헌신 대상은 조직과 개인이 아니다. 조직과 개인을 떠나 미래에도 자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인 목적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헌신의 대상이다. 존재 목적을 상실한 개인과 조직에 대한 맹목적 헌신은 개인에 대한 우상화와 집단사고의 참사를 가져온다.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이유는 이런 헌신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한 틈을 타고 마치 확실한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나서는 사이비 리더가 넘쳐 나기 때문이다.
미래는 "헌신하는 인재들의 협업"에 의해서 불확실성의 커튼이 벗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목적에 대한 믿음을 쇄빙선으로 삼아 올바른 헌신을 이끌어내는 진성리더가 많아지는 헌신 사회(Social Commitment)를 소원해본다.
작성일 : 24-07-3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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