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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공주의 사랑 긍휼의 사랑
평강공주의 사랑
긍휼의 사랑
누구에게 참 스승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은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지만 스승 가르침의 본질은 제자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최고의 문제해결력을 요구하는 사랑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타자는 최고의 스승이라고 가르쳐왔다. 고통을 가진 타자를 사랑해가며 타자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스승됨의 두 가지 이슈를 한 몫에 해결해준다. 타인의 고통조차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그릇 크기인 인격의 확장을 의미하고 갖은 혁신적 실험을 통해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도출한 것은 지적인 성장이다. 고통으로 아파하는 상대를 온전한 타자로 받아들여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면 이런 질적 성장은 불가능했다.
레비나스는 인간은 제대로 된 타자되기를 통해 성숙한 윤리적 인간으로 성장한다고 조언한다. 타자되기는 자신이 안주해왔던 동일성의 범주에서 탈주해서 대문자로서 자신의 가면을 벗고 고통을 가진 타인의 맨 얼굴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최초의 심각한 타자되기는 연인관계를 통해서다. 서로에게 이성은 완벽한 타자로 다가온다.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를 온전한 타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전한 타자로 받아들이기 위해 연인들이 동원하는 메카니즘이 애무다. 애무는 상대를 포획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성의 주체로 세우는 최고의 사랑 행위다. 연인을 진정한 독립된 타자로 인정하지 않는 애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타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애무는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연기일 뿐이다.
연인간의 타자성을 통해 상대를 윤리적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행위는 어느 시점이 되면 한계에 봉착한다. 상대를 타자로 세우는 성숙한 행동보다는 상대를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종속시켜 안정적으로 향유하려는 욕망이 더 크기때문이다. 연인들도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온전하게 파악할 때까지는 타자성을 지켜가며 애무하는 행동을 보인다. 타자로서의 사랑은 통상 여기까지다. 상대와 나의 차이가 파악되는 순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상대는 내 동일성의 정신모형 속에 포획해 안정적으로 욕망을 충족시켜가며 소유되어야 할 존재로 전락한다. 연인 사이에 애무가 사라지고 사적 욕망을 위해 자신의 동일성으로 상대를 포획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서로의 기도가 실패하면 연인이나 부부는 헤여지든 이혼을 한다.
이런 자신의 정신모형으로 상대를 포획려는 기도가 탄로나기 전에 자식이 탄생하는 것은 축복처럼 보인다. 부부간 상대를 자신의 동질성 감옥에 포획하려는 전쟁으로 서로가 탈진해 있을 때 자식의 탄생은 휴전선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큰 착각이다. 자식은 더 큰 타자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는 자신의 정신모형에 서로를 포획하려는 기도가 실패하면 헤여질 수 있으나 자식은 포획되기를 거부해도 헤여질 수가 없다.
자식은 자신의 몸과 유전자의 공유하는 상태로 태어났어도 부모의 동일성에 의해서 쉽게 포획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다. 부모는 자식을 동일성 범주에 따라 자신의 밈이자 모범생으로 길들이기 위해 시도하지만 이 시도는 대부분이 실패한다. 역으로 자식은 부모의 이기심을 초토화 시키는 최초의 스승이다. 부부간 강력한 연합전선을 펴도 아이는 쉽게 포획되기를 거부한다. 가끔은 포획된 것처럼 모범생 모드를 보이지만 포획된 것처럼 연기한 것이다. 자식은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도 순진한 얼굴로 부모를 길들인다. 길들이다 실패해도 나를 버리지 말고 그냥 나를 나로서 사랑해주세요라는 주문을 내린다. 자식은 우리에게 나를 통해서 태어났어도 절대로 내 소유가 될 수 없다는 타자성을 가르쳐 내가 윤리적 주체로 거듭날 것을 명령하는 최초의 스승이다. 자식을 키워보지 못했음에도 타자윤리를 습득해 존경받는 리더로 거듭난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들이다.
집안에 장애아가 있거나 말썽꾸러기가 있는 집안의 부모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더 큰 타자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픈 손가락에 해당하는 자녀가 부모에게 더 큰 스승(타자)이다. 이런 부모들은 다른 부모보다 아픈 사람들을 타자로 환대하는 더 큰 자아를 습득한다. 이들을 스승(타자)으로 모시고 제대로 환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나델라가 MS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도 나델라가 타자되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나델라 가족에도 아픈 손까락인 장애아가 있다. 나델라의 리더로서의 탁월성은 아픈 손가락에서 배우는 타자되기 외연을 혈연적 가족을 넘어 자신과 일상에서 만나는 고객, 직원, 경쟁사에게 까지 확대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타자를 스승으로 삼아 끊임없이 배우려는 겸손함이 MS를 살려냈는지 모른다.
레비나스 주체 윤리학에서 타자와 나는 동급이 아니다. 타자를 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고 스승으로 삼을 것이 요구된다. 이런 타자되기는 진성 서번트 리더가 부하들을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레비나스의 타자성 윤리에 따르면 반푼이로 고통받던 바보온달을 긍휼로 사랑해 자신의 발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온팽이로 만든 평강공주 같은 사람이 최고의 스승인셈이다. 아마도 평강공주가 부활해서 이런 후세사람들의 칭찬을 듣는다면 평강공주는 이런 칭찬을 자신에게 절대적 타자이자 스승이었던 바보온달에게 돌렸을 것이다. 긍휼로 사랑할 수 있는 아픈 타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최고의 스승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긍휼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다. 긍휼은 서로간 타자성을 지켜내는 원천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해가며 긍휼로 사랑하고 일으켜 세워질 때 다양성은 간주간적으로 휘어져 환대의 공동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