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iem
어른이 되어도 춤출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춤출 수 있을까?
죽음과 삶 사이의 곡예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고 움직임의 결과로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의 증거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화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진리 뿐이다.
근원적 변화를 이끄는 두 힘은 아픔과 목적이다. 목적은 변화를 앞에서 끌어주는 끌개(puller/attractor/driver)이고, 아픔은 뒤에서 밀어주는 변화의 밀개(pusher/lagger/reinforcer)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변화는 앞에서 끌어주는 목적의 끌개가 아닌 뒤에서 밀어주는 고통의 밀개 때문에 시작한다. 누구든지 아픔이라는 떠밀림이 없다면 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부서지지 않았다면 고치지 마라”라거나 “긁어서 부스럼 내지 마라”는 조언이 있을 정도다. 변화가 순전히 밀개의 힘으로 진행된다면 근원적 변화에는 이르지 못한다. 고통이 해결되는 순간 변화를 멈추기 때문이다.
변화는 아픔을 느끼고 해결하는 밀개에 의해 시작되지만 이 아픔을 반드시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면 변화는 목적이 앞에서 끄는 근원적 변화의 힘으로 추동된다. 아픔이 목적과 접속했다는 것은 아픔을 반드시 자신이 나서서 치료해야만 할 이유를 안 것이다. 자신 아픔의 치유를 넘어서서 계속 변화해야할 이유를 안 것이다. 목적과 만난 아픔이 자신이 품고 있던 종자였던 밀 알을 긍휼의 마음 밭에서 제대로 썩은 밀 알이 되도록 숙성하고 발효시킨 것다. 일반적 변화와 달리 근원적 변화는 뒤에서 떠 미는 밀개인 고통과 앞에서 끌어주는 목적의 끌개가 서로 협업할 때만 경험한다.
고통은 숨겨져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열정(Passion)의 어원도 고통이다. 열정은 자신의 몸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 얻게 되는 희열의 에너지다. 고통을 남들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주인이 되어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삶을 위한 내재적 에너지 저장고가 있는 사람이다.
변화와 생성의 반대말은 중력이다. 중력의 악령에 사로잡히면 움직임조차도 귀찮아지고 결국 움직이지 못하면 죽음으로 소멸된다. 중력은 죽음의 악령이다. 변화와 생성이 이끄는 곳은 미래이고 중력이 이끄는 곳은 과거로의 잊혀짐이다. 결국 인생이란 중력의 악령이 버티고 서 있는 잊혀짐이 본질인 과거와 다양성과 생성을 위한 목적의 종소리가 이끄는 미래 사이에 연결된 줄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중력을 거부해가며 그 위에서 존재 목적이 이끄는 미래를 향해 가며 춤을 출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안성 꽃동네의 전설 최귀동 할아버지의 “빌어먹을 힘”에 대한 깨달음도 중력과의 싸움에서 얻은 것이다. “빌어 먹을 힘만 있어도 귀한 은총이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자신도 거지의 처지지만 중력을 이겨낼 힘도 없어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들의 아픔을 위해 동냥에 나섰고 이 중력을 거부한 “빌어먹을” 힘이 삶의 존재목적을 찾아 나섰던 오웅진 신부를 만나 꽃동네를 만들어냈다.
어느 순간 과거의 악령인 중력이 더 큰 힘을 행사하면 춤추기가 느려지고 중력에 굴복하면 결국 죽음으로 소멸된다. 미래를 향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춤 출 수 있는 사람들만 목적과 가치의 다양성 바다에 이름을 남긴다. 걸인임에도 목적의 바다에 이름을 남긴 박귀동 할아버지가 산 증인이다. 이들은 가벼워진 몸으로 죽는 순간까지 춤춘다. 생성의 희열을 만끽한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치유한 사람들만 중력에 맞서서 일어서고 걷고 달릴 수 있는 근력을 회복한다. 걷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을 춤추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삶의 목적이라는 끌개를 발견했을 때이다. 목적이 설계한 안무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인간은 중력을 극복한 자유인의 반열에 오른다.
존재목적이라는 끌개는 우리가 고통을 치유해 얻어낸 열정과 희열을 춤 출 수 있는 에너지로 고양시킨다. 존재목적은 고통을 해결해 얻어낸 열정과 희열을 증폭시켜 작고 일상적인 것에도 감사하고 춤추게 만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조금 더 높은 숭고한 것을 찾아 춤추게 만드는 마음,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인정하는 수오지심으로 춤추게 하는 마음, 남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긍휼감으로 춤추하는 마음 모두가 고통을 해결해 얻어낸 희열이 존재 목적과 조우했을 때 생기는 춤의 기적이다
목적의 끌개를 상실하면 한 때 춤으로 유명했던 사람들도 중력의 힘에 밀려 춤추기를 포기하고 춤출 수 있는 어른의 대열에서 사라진다.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아이처럼 춤출 수 있는 비밀은 삶을 목적에 정렬된 것들로 단순하고 담백하게 채웠을 때다. 목적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욕심과 이를 위해 쓰고 있던 무거운 가면을 훌훌 벗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얻었을 때다. 춤출 수 있는 어른은 목적만 빼고 모든 것을 덜어낼 수 있는 어른이다.
나이가 젊었다고 모두 춤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춤출 수 없는 이유는 존재목적을 잃어버린 사회가 춤추지 못하는 애늙은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는 청소년과 고령인구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다. 자살은 자신이 더는 춤출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중력에 먼저 항복하는 행위다.
삶은 죽음의 사자인 중력과 생의 전령인 변화 사이에서 벌이는 이중몰입이다. 중력을 이기고 근원적 변화를 성취한 사람들만 춤의 희열을 느껴가며 세상에 족적을 남긴다. 춤출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삶의 주인공이 된다.
Ps: 필립 할스만이 찍은 몬로, 캘리, 햅번이 점프하는 Jump with Love(Jump in Love; Love Jumping)사진들. 할스만은 자신의 점프철학인 점프로지에서 점프를 중력에 대한 거부의사로 설명하고 있다. 할리스만은 점프를 유행시킨 사진작가다.
“When you ask a person to jump, his attention is mostly directed toward the act of jumping, and the mask falls, so that the real person appears.”
Philippe Halsman’s Jumpolog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