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earning

애완로봇이 애완동물을 대체할까? 대한민국 반려산업의 전망

Jan 15, 2026 ·5분 ·jkyoon · 461

애완로봇이 애완동물을 대체할까?
대한민국 반려산업의 전망
요즈음 인공지능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뛰어난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공지능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 위로를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심리 상담사 보다 더 편하고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심각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들은 인공지능을 심리 상담사 기능을 내포한 반려동물처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정서의 영역은 침범할 수 없다는 믿음이 송두리째 깨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의 경계는 무엇인가?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반적 감정(희, 노, 애, 락, 애, 오, 욕)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인간을 추월했다. 인공지능이 따라오기 힘든 정서는 윤리적 정서다. 하지만 윤리적 정서 중에서도 혼자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 분노, 죄책감, 수치심, 자부심 등의 감정은 거의 따라잡았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이 따라오지 못하는 윤리적 정서는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궁극적 존재목적에 근거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공의(Conscientiousness)이고 다른 하나는 아픔을 공유해 존재론적 관계를 만드는 긍휼(Compassion) 이다.
사람들이 자세히 구별하지 않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비슷한 감정으로 공감(Empathy), 위로(Sympathy)가 있지만 이런 감정은 도덕적 감정인 긍휼(Compassion)과는 다른 개념이다.
공감(Empathy)은 상대가 가진 아픔이나 기쁨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은 슬픈 드라마를 보면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채널이 바뀌어 코메디 프로그램이 나오는 금방 울었던 것을 잊고 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가진 아픔에 대해서 이해하고 초보적 시혜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이 위로(Sympathy)다. 위로는 아픔에 대해서 들어주고 등을 다독거려주고 반창고를 붙여주고 진통제를 주는 수준이다. 배고푼 사람에게 남는 고기를 나눠주는 것도 위로다. 비를 맞고 있는 상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행위도 위로다. 위로는 상처를 봉합하는 수준에서의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에게 보이는 시혜적 행동이다. 이런 시혜적 행동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의존성을 늘리는 문제를 초래한다. 야생오리가 불쌍하다고 오리에게 지속적으로 먹이를 공급하면 오리는 뚱뚱해진 오리가 되어 날지 못한다.
사실 공감이나 위로까지 생각하면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탁월할 수 있다. 내가 진솔하게 쓴 글이나 사진 등을 읽고 내면적 감정 상태를 더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추월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대부분이 연기된 감정이지만 인공지능에게는 연기되지 않는 진짜 감정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제공되는 데이터가 오염되지 않은 데이터다.
이런 내 내면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이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로도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길 방법이 없다. 광범위한 대안들을 가지고 나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최적화된 위로를 제공하는 것은 상담사가 아니라 인공지능이다.
나에 대해 위해를 가하지 않고 이런 감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공지능이 예뻐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애완로봇이 애완동물을 대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반려묘나 반려견을 돌보기 위해서는 집사역할도 하고 실제 큰 비용이 들어가지만 애완로봇은 배터리만 교체해주면 된다. 결국은 반려 산업에서 애완동물이 똑똑한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서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이나 위로까지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정서는 공감, 위로의 일반정서가 아니라 긍휼(Compassion)이라는 도덕적 정서다.
긍휼은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근원적 수준에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되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는데는 도움을 주고 위로가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나 상대를 주인이자 리더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긍휼은 상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산을 치우고 비를 같이 맞는 행동이다. 한나 아렌트는 긍휼을 아픈 사람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행동이라고 표현한다.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고 상대 얼굴을 대신 쓰는 행위는 피부를 살갗을 벗겨내는 아픔을 감내하는 것이다. 아픔을 공유하는 행위가 요구되고 아픔의 공유를 통해서 둘은 같은 공동운명체의 도반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감정이다. 또한 고통의 공유를 넘어 서로의 고통을 근원적 수준에서 치유하고 서로를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행동을 포함할 수 있을 때 긍휼의 감정을 체험한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아픔을 공유한 것처럼 연기할 수 있어도 실제로 공유해 아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픔을 공유한 상태를 통해 서로가 존재론적 관계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이런 연결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한 긍휼에는 치유하고 고통을 이겨내 삶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환대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도 이런 고도의 공동체적 환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뛰어난 인공지능의 공감과 위로 정서지능을 이용해 인공지능을 반려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다. 인공지능이 서로를 존재론적 관계로 일으켜 세우는 환대(Hospitality)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긍휼의 사랑으로 서로를 환대할 수 있다.
환대 Hospitality는 병원의 어원이기도 하고 여관의 어원이기도 하다. 병원에서는 환부가 수술되고 호텔에서는 치료가 진행되는 편안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아픔에 대해 치유하고 서로를 공동체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환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고통을 못 느끼는 인공지능은 환대가 아니라 반려 행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긍휼을 통해 서로가 주인이 되는 공동체를 세우는 행동이 환대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진실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복원하는 감정인 긍휼을 흉내 내지는 못한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의 사랑으로 치유해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인이자 리더로 만드는 것은 환대의 리더십이다.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지금처럼 아픔이 뿌리 깊게 자라고 있는 시대는 공감 리더십(Empathy Leadership)이 아니라 긍휼에 기반한 환대 리더십(Hospitality Leadership)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아래 그래프는 구글 트랜드를 통해 지난 20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환대와 반려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추이를 추적해본 것이다. 미국은 환대와 반려가 같이 가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한국은 반려는 급증하는 반면 환대는 점점 죽어가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은 초경쟁 사회에서 생긴 상처를 긍휼로 치유하기보다는 반려동물로 봉합하고 살았다는 증거다. 대한민국에서 반려산업이 환대산업을 추월하는 현상은 공동체 상실에 대한 사이렌 소리다.

← 칼럼 목록으로
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