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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최종 변론을 들어야 하는 고통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내란 최종 변론을 들어야 하는 고통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자고로 효과적 소통을 상징하는 대표적 소통은 말 한 마디로 천량빚을 갚을 수 있는 소통이다. 희랍시대부터 연구되던 소통의 주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량빚을 갚는 소통이 아니라 이기는 소통의 기법만을 강조하는 소피스트의 기술적 소통 방식에 대항하기 위한 소통의 방식을 연구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떠나 적용되는 효과적 소통의 삼 요소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강조했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화자의 에토스에 관한 교훈이다.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는 가짜뉴스로 마을 사람들을 두세 번 골탕 먹이는 일에 성공한 후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도움을 요청해도 마을사람 어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늑대가 출현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토스를 잃은 화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기법을 연마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여도 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신뢰를 잃어버린 지도자에게 커뮤니케이션 기법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파토스는 화자의 입장에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 입장에서 소통할 때 살아난다. 소통을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해 상대의 머리 속에 각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 속에 심는 행위로 규정한다. 파토스를 실현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청자들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즉 어떤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상대의 마음 속에 자신의 이야기로 씨앗을 뿌려야 하는데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낼지 마음 깊이 받아들여 뿌리 내리게 도와줄 지는 청자의 마음의 밭이 결정한다.
파토스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화자는 청자의 정신모형이 파악될 때까지 청자로부터 듣는 것에 치중한다. 청자의 마음의 지도가 파악되면 이 지도에 자신의 소통을 어떻게 끼워넣을지를 고민하기 위함이다. 상대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소통이 최고의 소통이다. 이런 소통을 청자가 뱉어낼 리 없다.
마지막 로고스의 문제는 전달하는 서사의 구조에 관한 문제다. 에토스도 없고 파토스를 읽는데도 실패할 때 화자는 마음이 급해져 강력한 결론을 다른 강력한 결론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헝식론적 순환론으로 승부한다. 뇌과학 연구도 뇌가 시간을 경험하지 못하는 속성 때문에 시간 순으로 일어난 사건도 형식논리를 앞세워 자기에게 유리하게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변론하는 오류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결론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대화의 기본이지만 강조하는 방식이 밑장을 빼서 위장을 막는 방식을 쓴다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깊이가 없거나 모르고 이야기 하고 있거나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사기꾼임을 직감한다.
대부분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상대의 아픔에 대해 진통제 처방이나 반창고를 붙여주는 처방에 머물어 상처를 감추고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게 만드는 순환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진정한 로고스로 무장한 사람들은 순환론적 형식론을 벗어나서 문제의 근원적 원인이 어떤 기승전결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이야기한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가장 이론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가 가장 실용적 처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다.
윤석열 내란사건에 대한 윤석열과 변호인들의 최후변론을 들어보면 현대판 소피스트들이자 달빛 짙은 밤 호수 위를 길이라고 믿고 걷는 무사들이다.
첫째 윤석열은 검사의 직업적 속성이 그런지 모르지만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 했던 장모 이야기에서 시작해 입만 열면 모두 거짓이었던 사람이다. 변호사들도 그간 거짓정보와 가짜뉴스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양치기 소년단이란 점이다.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토스를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아무리 몇 시간 씩 이야기해도 귀 기울여 들을 사람들은 없다.
둘째, 파토스도 없다. 이들의 청자는 태극기부대와 윤어게인이라는 비현실적 정신모형을 가진 극소수 토굴 극우세력들이다. 이들이 토굴안에서 소리지르는 변론의 챔버효과를 마치 일반국민들이 반응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이들의 메아리를 듣는 사람들은 오직 토굴에 사는 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일반국민들은 이들 수준보다 훨씬 높은 상식적 수준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 토굴세력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언어로 소통한다.
마지막으로 로고스도 없다. 몇 시간짜리 계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보이는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형식적 순환논리의 극단적 사례다. 국민들은 이들이 일으킨 계엄의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피흘려 만든 민주주의 역사가 원점으로 되돌이켜질 수도 있다는 공포가 만든 트라우마는 계엄세력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 사상자의 문제를 넘어서 이들이 가해한 심리적 트라우마는 영원히 남을 국가의 치욕이자 상처다.
내란 주범들이 최후변론에서 사용하는 소통은 천량빚을 갚는 소통과는 무관한 소통을 빙자한 폭력이다. 꼼짝없이 불모가 되어 이들의 황당무게한 반복적 이야기를 오랜 시간동안 꼼짝없이 들어야 하는 상황은 일반인에게는 고통이다. 하루 빨리 선고가 나서 이들이 다시는 마이크를 잡고 시끄럽게 떠드는 장면을 공공 언론채널을 통해 목격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나타나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가 불쑥불쑥 다시 살아난다. 정말 우연히 길에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